완벽한(줄 알았던) 일상이 부서지는데, 머리카락 한 올이면 충분했다. 남편의 머플러에서 발견된 빨간색 머리카락 한 올. ‘설마?’ 머리에 빨간 물 들인 세상 모든 여자가 지선우(김희애)의 용의 선상에 오른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다독여보지만, 그것은 설마도 아니고 예민한 것도 아닌 여자의 무서운 촉. 다정했던 남편의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고, 지인들은 그런 남편의 이중생활을 알면서도 묵인한 공범이었다. 아니, 이 모든 걸 지켜보며 내심 비웃었겠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기만이었음을 알게 된 지선우는 시멘트처럼 굳어버린다.
속도감이 엄청나다. 보통의 드라마가 몇 회에 걸쳐 풀어낼 ‘불륜 발각’ 서사를 <부부의 세계>는 1회 만에 롤러코스터처럼 타 넘으며 지선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지선우는 벼랑에 매달린 아내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기존 드라마에서 배신당한 아내가 복수하는 방법으로 가장 많이 애용됐거나 어처구니없이 사용된 것은, 남편보다 완성형인 남자에게 구원받거나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돌아와 모두를 속이는 것이었다. 지선우는 둘 다 아니다. 백마 탄 왕자나 점 찍기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치밀한 계획으로 모두에게 지옥의 맛을 선사한다. 지금 <부부의 세계>에 쏟아지고 있는 기이하고도 뜨거운 관심의 비밀. 마라맛 대환장 파티인데도 쉽게 끊기 힘든 기묘한 중독성의 정체. 그건 지선우가 TV 앞에 모여든 시청자들을 자신의 열혈 우군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련한 본처의 전형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속인 세계에 강한 어퍼컷을 날리면서, 그 와중에 우아함을 사수하는 지선우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캐릭터다. 연민의 꼬리를 자르고 목표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 들어가는 지선우에게 대중은 손을 흔든다.
그 안에서 지선우를 연기한 김희애는 시청률의 일등 공신 정도가 아니라, 그냥 드라마의 8할이다. 매회가 파국이고, 매회가 마지막 회 같은 드라마에서 김희애는 슬픔과 분노, 상실, 굴욕 등의 감정을 후려치듯 쏟아낸다. 자기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젊은 여인과 차에서 몰래 밀애의 시간을 갖는 남편 앞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호흡 곤란을 느끼다가 처연한 표정을 짓는 김희애는 양립하기 힘들 것 같았던 두 가지 온도를 관객들에게 전이시킨다. 그리고 이 넘실거리를 감정의 파고는 단순 막장극으로 치부될 뻔한 드라마를 심리극으로, 때론 공포 스릴러로 끌어올린다. 때문에 우리는 예고편이 흐르는 순간, 다음 회차의 미끼를 물 수밖에.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 유명한 SK-Ⅱ 광고 카피는 물광 피부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김희애는 언제나 자신에게 부여된 미션을 놓치지 않았다. 82년 제일모직 주니어복 CF로 데뷔해 ‘책받침 여신’으로 활약한 80년대를 지나, 최진실-채시라와 9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고, 전영록이 작사 작곡한 ‘나를 잊지 말아요’로 웬만한 가수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가요톱텐> 1위 트로피도 안았다. 1991년과 1993년엔 <산너머 저쪽>과 <아들과 딸>로 MBC 연기대상을 받았는데, 91년 당시 김희애의 나이 24살. 한효주가 2010년 <동이>로 대상을 받기까지, MBC 연기대상 최연소 대상 보유자는 김희애였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돌이켜보면 예언과 같았다. 결혼으로 쇼비즈니스 세계를 떠난 7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김희애를 잊지 않았다. 2003년 드라마 <아내>로 컴백함과 동시에 김희애는 우아한 15초 여신으로 럭셔리 광고를 장악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엔 “초코파이 한 개를 다 먹어본 적이 없다”는 엄격한 자기 관리가 있었다. 한국의 빌 게이츠로 통했던 ‘IT 사업가 이찬진’과의 결혼이 안기는 신비주의, ‘재테크 고수’로서의 이미지, 빈틈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절제된 면모 등이 결합한 덕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20대에 브라운관을 정복했던 스타가 긴 공백을 깨고, 하물며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사실을 굳이 가리지 않고도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사실 거의 본 적 없다.
“임자 있는 남자 나눠 갖는 여자가 원하는 게 뭘 거 같니? 나누지 않고 혼자 갖고 싶은 거 아니겠니?” 등의 뻔뻔한 대사를 날린 <내 남자의 여자>의 파격적인 ‘상간녀’일 때도, 스무 살 어린 제자에게 칭찬을 특급으로 남발했던 <밀회>의 ‘외도녀’일 때도, (그 대가인가!) 남편으로부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궤변에 시달린 <부부의 세계>의 ‘본처’를 연기하는 지금도, 김희애는 오금 저리는 광기와 밀도 넘치는 감정을 꺼내 들며 드라마가 말도 안 되게 이탈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다. 특히 친구의 남편을 빼앗는 희대의 불륜녀 이화영을 연기한 <내 남자의 여자>에서 김희애의 이름은 다시 쓰였는데, 그녀의 이미지 변신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시청자들이 미워할 수 없는 악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이화영과 지선우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엄청난 캐릭터 낙차는 또 어떠한가.
문득 궁금하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김희애를 TV로 지켜보며 <부부의 세계> 작가 주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드문 일이긴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배우와 작가가 ‘기분 좋은 밀당’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작가가 ‘어디까지 캐릭터를 소화 할 수 있나’ 써내면, 배우가 ‘그 정도쯤이야’ 회답하듯 연기를 해내고, 그럼 작가가 전투력이 충만해져 배우를 더 한계로 몰아붙이는 밀당 말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의도한 것 이상의 연기를 배우가 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부부의 세계>에서의 김희애가 그렇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논란이 된 ‘범죄자(1인칭) 시점의 지선우 폭행 신’이 더 논란이 된 건 연출과 대본 탓이기도 하지만, 이를 연기한 배우가 김희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들고 찍은 클로즈업 장면에서 김희애는 눈까지 까뒤집는 연기를 선보이며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고품격 치정멜로라면서요! 물론 배우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기는 장점으로 발화돼 극에 활기를 부여할 때가 훨씬 많고, 사실 거의 그렇다. 가령, 붉은 가죽 트렌치코트 휘날리며 장총을 들고 ‘여우회’ 모임에 슬로우모션으로 나타난 지선우 씨는 이토록 멋질 일인가. 보는 시청자도 흥미로운데, 집필한 작가는 얼마나 짜릿할까.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