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배드>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브레이킹 배드>는 역대 최고의 TV 시리즈라 불리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와 연출, 여운을 남기는 결말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매력적이지만 역시 <브레이킹 배드>를 논할 때 캐릭터가 빠질 수 없다.

좋은 캐릭터를 탄생시키는 데엔 독창적인 매력만큼이나 다른 인물과의 케미스트리도 중요하다. 시리즈 주인공이자 최악의 악역으로 군림한 월터 화이트는 “TV 역사상 가장 다면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라 불리지만, 제시나 행크, 거스 등과의 ‘케미’가 없었다면 월터뿐 아니라 작품 전체가 이토록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환상, 혹은 환장의 케미로 <브레이킹 배드>를 빛낸 인물 조합을 소개한다.


1. 월터 화이트 & 게일 베티커

게일 베티커는 <브레이킹 배드> 시즌 3에서 월터의 조수로 일했던 화학자다. 제인의 죽음 때문에 실의에 빠진 제시를 대신해 구스타보 프링(a.k.a 거스)가 붙여준 대체자인데, 예상외로 월터와의 케미가 나쁘지 않았다. 마약 제조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이나 월터와의 공통분모가 없었던 제시와 달리, 게일은 여러 방면으로 지식이 해박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 그러나 게일과 월터 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스가 마약 제조 비법을 캐내기 위해 심은 인물이라는 것을 제시와 월터가 깨닫게 되고, 결국 본인들이 살기 위해 게일을 희생양 삼기 때문. 슬픈 사실은, 거스의 의도와 상관없이 게일은 순수하게 월터를 동경했다는 점이다.

2. 스카일러 화이트 & 마리 슈레이더

스카일러 화이트와 마리 슈레이더는 <브레이킹 배드> 초창기만 하더라도 상당히 가까운 자매 사이로 묘사된다. 종종 티격태격하긴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 때문이었으며 무엇보다 자녀가 없던 마리가 스카일러네 아이들을 극진히 아꼈다. 그러나 시리즈 막바지로 흘러갈수록 두 사람은 자매는커녕 남보다 못한 사이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마약단속국 요원의 아내와 ‘마약왕 하이젠버그’의 아내이자 조력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입장의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가족에서 철천지원수로 변하는 스카일러와 마리의 관계도는 <브레이킹 배드>의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3. 월터 화이트 & 행크 슈레이더

월터 화이트와 행크 슈레이더의 관계야말로 <브레이킹 배드> 통틀어 가장 긴장감 넘치지 않나 싶다. 겉으로는 가까운 동서지간이지만, 알고 보면 쫓고 쫓기는 관계였던 두 사람의 모습은 시리즈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했다. 은근히 자격지심을 느끼는 월터, 반대로 존중과 연민을 담아 대했던 행크의 온도 차이도 볼만하다. 다섯 번째 시즌이 되어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행크는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음에도 월터의 눈 앞에서 목숨을 잃기 전 “당신보다 똑똑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라고 인정하며 마지막까지 ‘절대 선역’의 면모를 발휘했다. 종국엔 파국으로 치닫았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월터를 아끼고 존중했던 정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4. 리오넬 & 마르코 살라만카(a.k.a 사촌 쌍둥이들)

이른바 ‘사촌 쌍둥이들’이라 불리는 리오넬과 마르코 살라만카는 말수는 적을지언정 존재감만큼은 대단했다. 두 사람이 등장하면 자연스레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심장을 졸이게 되는데, 냉철하고 실력이 좋은 암살자로 악명을 떨치면서도 표적이 샤워를 끝낼 때까지 얌전히 침대에 앉아 기다리는 미덕(?)으로 웃음을 선사한다(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은 덤). 리오넬은 행크와의 혈투 중에 사망, 총알과 도끼가 오갔던 현장에서 두 다리를 잃은 마르코는 병원에서 마이크 어만트라우트에게 독살당한다. 후속 스핀오프 <베터 콜 사울>에서는 이들의 과거가 등장한다.

5. 행크 슈레이더 & 스티븐 고메즈

행크와 스티븐 고메즈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불알친구’다. 마약단속국에서 함께 산전수전 다 겪으며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 둘은 시리즈 내내 현실 친구가 아니면 내지 못할 진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다. 걸쭉한 욕지거리, 가족이나 피부색 언급도 서슴지 않는 디스는 이들에게 평범한 안부인사나 다름없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직장 동료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니, 과격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슴 따뜻한 남자들이다. 두 사람을 가지고 버디 무비 스핀오프를 만들어도 큰 인기를 끌 듯한데, 최근 방영된 <베터 콜 사울> 시즌 5에 등장했다고 하니 차기 시즌을 기대해보자.

6. 뱃저 & 스키니 피트

제시의 오랜 친구로 소개되는 뱃저와 스키니 피트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아주 큰 비중이 있는 캐릭터들은 아니다. 딱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약과 술, 파티, 비디오 게임이라면 환장하는 두 사람의 행적만 놓고 보면 제시에게 악영향만 줄 듯하지만, 사실은 제시가 편하게 대하고 의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들이다. 뒤로 갈수록 ‘애들이 참 착한데…’라는 생각이 들만큼 선한 모습도 보여주고, <스타트렉>이나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너디(nerdy)한 매력도 풍기며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참고로 둘은 <엘 카미노: 브레이킹 배드 무비>에서 제시가 앨버커키를 떠나 알래스카에서 새 삶을 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7. 사울 굿맨 & 마이크 어만트라우트

지미 맥길(a.k.a 사울 굿맨)과 마이크 어만트라우트의 케미스트리는 <베터 콜 사울>에서 더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둘의 첫 만남을 소개하기도 했고, 본작에선 ‘해결사’ 정도로만 알려진 마이크의 이야기를 상당히 큰 비중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베터 콜 사울>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여겨도 될 정도다. 그렇다고 <브레이킹 배드>에서 둘의 친분이 덜한 건 또 아니다. 마이크는 거스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사울의 부탁을 처리해주었는데,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돕는 모습을 보면 둘의 신뢰가 남다르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8. 월터 화이트 & 제시 핑크맨

마침내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월터와 제시의 조합은 <브레이킹 배드>를 넘어 TV 시리즈 역사 통틀어 최고라 불러도 아깝지 않다. 사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팀을 이루는 장면은 버디 무비 장르에서 수도 없이 본 익숙한 설정이다. 그러나 월터와 제시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둘이 단순히 동업자가 아닌 부자(父子)로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둘의 관계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마약 제조 노예’로 전락하기까지 제시를 무너뜨린 게 다름 아닌 월터의 욕심이었다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평범한 가장에서 잔인무도한 마약왕으로 거듭나며 인간성을 잃는 월터, 반대로 범죄자에서 점차 평범한 삶을 바라는 인간적인 성장을 이룬 제시의 행보는 <브레이킹 배드>의 관전 포인트.


에그테일 에디터 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