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 극장가와 영화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개봉 대기 중이던 할리우드 메이저 대작 라인업들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혹은 무기한 개봉을 연기했고, 국내 영화들도 활로를 바꿔 넷플릭스에 공개한 <사냥의 시간>이나 극장을 잡지 못했던 독립 영화들을 제외하곤 남은 작품들은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좀비가 휩쓸고 지나간 공간처럼 초토화된 극장 안을 채우는 건 예전의 익숙한 재개봉작들이다. CGV에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배우 '오드리 헵번 특별전'을 개최한다. 그녀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사브리나>, <화니 페이스>, <티파니에서 아침을>, <샤레이드>, <마이 페어 레이디>까지 총 6편을 4월 30일부터 4주간 단독 상영한다.
오드리 헵번은 그 찬란한 명성과 빛나는 연기력에 비해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1951년 <원 와일드 오트> 단역으로 데뷔해 은퇴작이었던 1989년 <그대 영혼 곁에>까지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서른 편이 안 되는 작품에 출연했다. 주연으로만 보면 스무 편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스타일은 전 세계 대중문화에 굉장한 파급력을 가져왔고, 영화 협찬의 개념을 처음 선보였으며, 패션 아이콘으로서 아직도 20세기를 대표하던 상징처럼 남아있다. 아울러 부와 명예 대신 허기에 굶주리는 난민 아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던 소셜테이너로도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이번에 개봉되는 작품들은 오드리 헵번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시기, 1950년대와 60년대 출연한 주옥같은 걸작들로 그 영화음악들에 대해 소개해본다.
로마의 휴일 (1953)
감독 : 윌리엄 와일러
음악 : 조르주 오리크
<로마의 휴일>은 발레리나에서 은퇴해 신인 단역 배우로 활동하던 오드리 헵번을 단숨에 할리우드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작품으로, 제26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프랭크 카프라 대신 메가폰을 거머쥔 거장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 최초로 이탈리아 로마를 올 로케이션하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후에 오스카를 가져갔지만 달튼 트럼보의 뛰어난 각본은 로맨틱 코미디의 교본으로 남아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질 듯 말 듯 달달하면서도 두근거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조르주 오리크의 활력 넘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음악 덕분이다.
오네게르와 미요, 플랑크, 타이페르 등과 함께 프랑스 현대음악을 이끌었던 ‘6인조’ 중에 한 명이었던 오리크는 발레음악과 음악 평론으로 유명했지만, 또 다른 직함은 바로 영화음악가였다. 특히 장 콕토와 함께한 일련의(11편의) 협업으로 유명한데,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정받으며 <리피피>나 <공포의 보수>, <물랑루즈> 등 화제작들에 참여했다. <로마의 휴일>도 그중 하나로, 왕가를 상징하듯 세련되고 고상한 품격의 사운드와 소박하지만 이국적인 분위기를 교차하며 신분을 감춘 공주의 하룻밤 여행기와 특종을 노리다 사랑에 빠지는 기자 간의 멜로라인에 몰입하게 만든다. 아쉽게도 이번에 개봉되는 작품들 중에선 유일하게 사운드트랙이 공개되지 않아 영화 속 조악한 모노 음질로 오리크의 음악을 감상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미칠 듯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체험하는 덴 전혀 지장이 없다. 따로 표기되진 않았지만 타이틀 음악은 파라마운트 영화사 음악 감독이었던 빅터 영이 작곡했다.
사브리나 (1954)
감독 : 빌리 와일더
음악 : 프레드릭 홀랜더
사무엘 A. 테일러의 연극 ‘사브리나 페어’를 바탕으로 빌리 와일더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로,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이후 빌리 와일더 감독은 초기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하오의 연정>과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 탁월한 러브 스토리를 다수 연출하게 된다. <로마의 휴일>에 이어 오드리 헵번을 확고하게 스타덤에 앉힌 작품으로, 지방시가 헵번을 위해 직접 의상을 담당한 의상이 화제가 됐으며, 플랫 슈즈와 프릴 드레스, 검은 7부 바지 그리고 쇼트 헤어컷이 사브리나 스타일로 대유행하며 그녀를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형제간의 삼각관계를 다룬 고전이기도 하다.
음악을 맡은 건 독일계 유대인 출신의 작곡가 프레드릭 홀랜더로, 국내에선 그리 친숙한 영화음악가는 아니지만, 1930년 <푸른 천사>에서 마를렌 디트리히가 부른 ‘폴링 인 러브 어게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로 건너와 1955년까지 백여 편의 작품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간 그는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4차례나 오르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사브리나>는 그런 그의 할리우드 후반기에 위치한 작품으로, 영화 전편에 걸쳐 대중적인 곡조가 흘러나오길 원했던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의도에 따라 “My Ideal”, “I Don’t Want to Walk Without You”, “Lover”, “Dream Girl”, “Isn’t It Romantic?” 등 다양하고 익숙한 스탠다드 넘버들이 홀랜더의 독자적인 테마와 교묘하게 믹스돼 편곡되어 로맨틱하게 흐르고 있다. 아울러 오드리 헵번이 직접 부르는 “라비앙 로즈”까지 삽입돼 이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화니 페이스 (1957)
감독 : 스탠리 도넌
음악 : 아돌프 도이치
<화니 페이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로 유명한 뮤지컬의 대가 스탠리 도넌이 오드리 헵번과 만난 뮤지컬로, 발레리나 출신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헵번의 현란한 춤 솜씨와 매력적인 노래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거쉰 형제들이 작사 작곡하고 이 영화에도 출연한 프레드 아스테어가 나온 1927년 동명의 뮤지컬이 있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고, 레오나드 거쉬가 쓴 또 다른 뮤지컬 ‘웨딩 벨’을 각색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지 거쉰과 아이라 거쉰이 만든 곡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전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하고, 도넌의 뮤지컬에선 범작 취급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재평가되고 있다.
헵번은 이 영화의 참여 조건으로 프레드 아스테어를 주장했는데, 그는 환갑에 가까워진 나이임에도 거쉰 형제들이 작곡한 고전 넘버들을 탁월하게 소화해내며 천부적인 뮤지컬 스타임을 드러낸다. 음악 감독을 한 아돌프 도이치는 <오클라호마!>를 비롯해 <7인의 신부>, <애니여 총을 잡아라>, <밴드 웨곤>, <쇼보트> 등 1950년대 전설적인 뮤지컬 영화에 참여하며 오스카상을 3개나 거머쥐었는데,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브로드웨이에서 자신의 음악 경력을 시작한 터라 편곡과 지휘 및 선곡에 있어 기가 막힌 감각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뮤지컬을 위해 곡을 직접 쓴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동명의 “Funny Face”를 비롯해 “S Wonderful”, “He Loves and She Loves”, “Let's Kiss and Make Up” 4곡이 27년도 뮤지컬에서 가져온 곡이고, 그 외 거쉰 형제들의 다른 곡들과 오리지널을 위해 로저 에덴스가 레오나드 거쉬와 함께 몇몇 곡을 새로 작업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감독 : 블레이크 에드워즈
음악 : 헨리 맨시니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트루먼 카포티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애초 소설을 쓸 당시 염두에 둔 모델이 마를린 먼로라 원작자의 맘에 들지 않고, 오드리 헵번 역시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부른 주제가 “문 리버”와 지방시의 리틀 블랙 드레스, 진주 다이아몬드, 긴 담뱃대와 업 스타일 헤어 그리고 버그 아이 선글라스는 그녀만의 불멸의 상징이 되었다. 부유한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퇴폐적이고 속물적인 이미지를 헵번이 가진 순수함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중화(?)시키며 기묘한 낭만과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담아낸다.
TV시리즈 <피터 건>으로 안타를 친 블레이크 에드워즈와 헨리 맨시니 콤비는 이 작품으로 그야말로 홈런을 날렸다. 제34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휩쓴 건 물론, 그래미상도 거머쥐었으며, 이 사운드트랙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무려 90주가 넘도록 머물러 있었다. 낭만주의를 이은 할리우드 전통의 클래시컬한 스코어 작법 대신 대중적인 화법의 팝과 재즈 스타일로 관객들에게 영화음악을 어필한 맨시니의 접근은 60년대 영화음악의 지형을 바꿨다. 이후 존 배리나 프란시스 레이, 퀸시 존스, 렉스 벡스터 등과 같은 대중 뮤지션들의 영화음악 참여가 활발해졌다. 맨시니는 영화 속에 나오는 헵번에게 영향을 받아 “문 리버”를 작곡했고, 영화를 본 헵번은 이 아름다운 곡을 작곡한 그에게 감사 편지를 써 경의를 표했다. 이 곡은 지금까지 앤디 윌리엄스, 프랭크 시나트라, 주디 갈란드, 사라 본, 루이 암스트롱, 사라 브라이트먼, 바브라 스트라이젠드 등 수백 개 버전으로 녹음되며 사랑받았다. 미국영화연구소가 뽑은 영화 주제가 100년에서 4위에 링크됐다.
샤레이드 (1963)
감독 : 스탠리 도넌
음악 : 헨리 맨시니
<샤레이드>는 그간 헵번이 로맨스 영화들에서 보여주던 사랑스럽고 순수한 모습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 도전한 작품이다. ‘히치콕이 만들지 않은 최고의 히치콕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샤레이드>는 <화니 페이스> 이후 도넌 감독과 다시 조우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헵번은 <어두워질 때까지>나 <혈선> 등 본격적인 스릴러를 찍기도 했다. 같이 공연한 캐리 그랜트는 히치콕 영화의 단골 주연이고, 그레고리 펙 전에 <로마의 휴일>에 내정됐던 묘한 인연이 있다. 음악은 헨리 맨시니가 맡았는데, 조니 머서와 함께 작업한 동명의 주제가는 제36회 오스카 시상식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다.
스탠리 도넌은 헨리 맨시니가 음악을 맡은 <하타리>에서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를 듣고 매혹됐는데, 주연을 맡은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후 그와 친분이 있다는 걸 활용해 맨시니를 음악으로 끌어들였다. 스크루볼 코미디와 스파이 스릴러, 로맨스, 미스터리 등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영화에 하나의 음악을 선사할 인물로 헨리 맨시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국적이면서 로맨틱한 스타일뿐만 아니라 긴장감 넘치고 냉담한 분위기까지 동전의 양면을 오가듯 양극단을 담아내면서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에 적절히 균형을 잡는 그의 스코어는 매우 인상적이다. 외롭고도 애수 어린 파리지앵 왈츠 풍의 테마와 미스터리한 히치콕 스타일의 분위기가 교배된 맨시니의 음악은 헵번과 도넌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이에 히치콕은 버나드 허먼과 결별 후 <프렌지> 음악으로 헨리 맨시니를 발탁하지만, 의견 충돌 후 최종적으로 론 굿윈으로 교체하는 수모를 주기도 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감독 : 조지 큐커
음악 : 앙드레 프레빈
1913년 조지 버나드 쇼가 쓴 희곡 ‘피그말리온’을 바탕으로, 1956년 프레드릭 로우와 앨런 제이 레너가 만든 동명의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뮤지컬이다. 브로드웨이에서 7년 동안 장기 공연될 만큼 성공한 작품이라 영화화는 기정사실이었는데, 당시 인지도가 낮았던 뮤지컬 주역인 줄리 앤드루스 대신 헵번을 캐스팅하며 흥행하는 덴 성공했지만, 헵번의 목소리 대신 <왕과 나>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에서 데보라 커와 나탈리 우드의 노래를 부른 마니 닉슨의 곡으로 대체되며 헵번이나 관객들에겐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오스카를 8개나 휩쓸었지만 헵번에겐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프레드릭 로우와 앨런 제이 레너의 곡들을 영화 버전으로 옮긴 건 후에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에서 지휘자로 활약한 앙드레 프레빈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지지>나 <포기와 베스>, <키스 미 케이트>, <언제나 맑음>, <키스밋>, <페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당대 유명한 뮤지컬 영화들을 맡으며 깔끔한 해석력과 지휘 그리고 효과적인 스코어를 부수적으로 덧입혔다. 그가 수상한 4개의 오스카 중 3개가 뮤지컬 영화일 정도로 MGM 뮤지컬 황금기 시절 에이스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극 중에서 캐스트들과 같이 부른 “The Rain in Spain”이나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등에서 몇 소절 그리고 단독으로 부른 “Just You Wait”에서 헵번이 직접 부른 흔적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원작의 줄리 앤드루스와 비교돼서 그렇지 그리 나쁜 솜씨는 아니다. 상처뿐인 영광의 더빙 논란에도 그녀의 전성기 시절 매력적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단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