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영화들이 물러난 요즘, 의외의 영화들이 극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스페인발 스릴러 영화 <더 플랫폼>도 그중 하나. 초현실적인 수직 감옥과 그 안의 수감자들이 생존하는 과정을 그린 <더 플랫폼>은 “스페인 스릴러, 하나의 장르가 되다”(씨네21 이용철)이란 평가를 받으며 '스페인 스릴러'라는 장르마저 재조명하게 했다. 스페인 영화계의 스릴러는 어떻게 다르길래 하나의 장르로 규정됐을까. 국내외에서 자주 거론되는 스페인 스릴러 추천 리스트를 꾸며봤다.
장르는 섞어야 제맛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맨 처음 소개할 대상은 '작품'이 아니라 감독이다. 스페인 영화감독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는 특히 스릴러 장르에서 탁월한 감각을 선보여 그 이름이 곧 하나의 브랜드에 가깝다. 이글레시아 감독의 대표작이라면 2000년 <커먼 웰스>가 있다. 노인이 죽은 방에서 발견한 300만 달러를 독점하려는 홀리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아파트 주민 간의 추격전을 그린 영화로, 순간순간 재기발랄한 패러디와 섬찟한 폭력성을 대비시켜 이른바 '잔혹 코믹극' 장르의 대표작으로 뽑힌다.
서부극을 코믹하게 푼 <800 불렛>이나 바람둥이가 비밀을 알고 있는 여성의 살해 계획을 세우는 <퍼펙트 크라임> 등 긴장감 속에서 코믹함을 기막히게 뽑아낸다. 할리우드 영화 <오멘>에 화답하듯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코믹과 공포의 경계선에서 그린 <야수의 날>도 인상적이고,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처럼 스페인 현대사를 참혹한 복수극으로 승화시키는 대담함도 돋보인다. 최근엔 <더 바>라는 밀폐 스릴러와 전 세계에서 리메이크 붐이 분 '퍼펙트 스트레인저'(<완벽한 타인> 원작)의 스페인 버전도 연출했다.
스릴러라면 자고로 반전이 있어야
오리올 파울로
<더 바디>
앞서 설명한 이글레시아 감독의 뒤를 이을 '스페인 스릴러' 후계자는 오리올 파울로 감독이 아닐까 싶다. <인비저블 게스트> 전작 <더 바디> 또한 훌륭한 스페인 스릴러로 자주 소개된다. 자신이 살해한 아내의 시신이 사라진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딘가 익숙하다고? 맞다. 한국 영화 <사라진 밤>의 원작이다. 전체적인 연출이야 차기작 <인비저블 게스트>가 더 빛나지만, 데뷔작임을 감안하면 <더 바디>를 향한 관객들의 열광은 분명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떡잎'을 알아보기 충분했다.
<인비저블 게스트>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검색엔진에서 '반전영화' 검색하면 빠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언젠가부터 그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는 '아무것도 모르고 봐야 한다'는 관객들의 경고(?)가 뒤따르곤 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아드리안은 로라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아드리안은 누명을 벗고자 승률 100% 변호사 버지니아를 고용해 자신의 진술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재판까지 3시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인비저블 게스트>의 스토리는 심플하다. 그러나 이 영화, 법정 싸움도,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없이 한 인물의 시점을 극대화해 관객들의 추리에 혼선을 가한다. 2016년 가장 영리한 영화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탈리아에서 <인비저블 위트니스>로 리메이크 됐고, 충무로에서도 리메이크 계획 중이다.
<줄리아의 눈>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근본'을 찾자면 <줄리아의 눈>을 살펴보자. <줄리아의 눈>은 오리올 파울로가 기옘 모랄레스과 공동 집필한 2010년 영화. 스페인 스릴러를 검색하면 국내외 구분 없이 추천하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란성쌍둥이 언니 사라가 시력을 잃어가던 중 사망하고, 동생 줄리아 또한 시력을 잃어가며 위험에 노출된다는 내용. 언니가 사망한 이유를 좇는 미스테리 스릴러의 전개와 시력을 잃어가는 공포 영화적 설정이 결합시켜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 줄리아가 너무 무모한 성격으로 그려져 몰입을 방해한다는 혹평도 있다. 그와는 별개로 오리올 파울로 특유의 뒤통수 얼얼한 반전은 여기에도 확실한 존재감을 남긴다.
thㅏ랑도 스릴러로
스페인 스릴러 추천 3대장
<오픈 유어 아이즈>
이 분야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면 <오픈 유어 아이즈>가 아닐까. 할리우드에서 <바닐라 스카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오픈 유어 아이즈>는 세자르라는 젊은 남자의 몰락을 중점적으로 그린다. 세자르는 첫눈에 반한 소피아 때문에 애인 누리아에게 분노를 사 사고를 당한다. 사고로 얼굴이 완전히 망가진 세자르 곁을 소피아가 지킨다. 하나 어느 날 소피아가 사라지고 누리아가 자신이 소피아라고 주장하며 세자르는 혼란을 겪는다. <오픈 유어 아이즈>는 '몽환적'이란 단어를 가장 적절하게 영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토리 또한 환상과 실재의 경계를 교묘하게 오가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이제는 뻔한 결말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영상과 연기, 음악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으며 결말이 끄집어내는 과정이 흥미진진해 평단과 관객들이 열광했던 작품. '스페인 스릴러'라는 계보에 적합한지는 차치해도 스페인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영화인 건 확실하다.
<내가 사는 피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독특한 영화.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가 인공피부를 만들기 위해 납치와 감금을 하는 내용이기 때문. 그러나 <내가 사는 피부>에서 이 설정을 슬그머니 드러낸다면, 신경증적 인간을 묘사한 그의 그간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핍과 집착, 사고와 실수로 이어진 인물상과 섹슈얼리티와 그로테스크의 절묘한 접점에 놓인 묘사들이 스페인 명감독식 스페인 스릴러의 진가를 보여준다. 보는 이에 따라 스릴러를 넘어 공포감을 느낄 심리적 괴리감이 특히 큰 영화.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미스테리 로맨스 드라마'라는 미심쩍은 장르를 표방하고도 로튼토마토 평론가, 관객 지수 모두 90%를 넘긴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영화는 1970년대 강간살인 사건과 25년 후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은퇴한 수사관의 시간을 토대로 하나의 사건을 직조한다. 과거의 범인을 쫓는 묵직한 스릴러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사회상과 맞물리면서 사회 드라마적 색채까지 가져간 종합선물세트에 가깝다. 단순히 스페인 스릴러라는 범주를 넘어 스페인 영화 중에서도 추천작에서 자주 만나는, 이름난 명작.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