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부럽다! 20년 지기 절친들이 같은 공간에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사랑과 우정을 도모하면서 밴드 활동까지 함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99학번 의예과 동기로 만나 절친이 된 다섯 명의 의사가 퇴근 후 모이는 지하 연습실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을 지켜보는 시청자에게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평화로운 아지트였다. ‘미도와 파라솔’ 밴드가 전하는 90년대 음악은 추억의 부스러기를 건드리기도 했으니, 덕분에 행복한 목요일 밤이었다.
그래서일까. <슬의생>이 방영되는 내내 들었던 질문. “99즈 멤버 중에 누가 너 타입이야?” 이 기시감은 그러니까, 흡사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 누굴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무관하지 않다고 느끼는 게, 실제로 ‘99즈’ 멤버 구성은 아이돌의 그것과 묘하게 닮았다. 하나의 그룹 안에 잘생김·유머·터프함·보컬 등을 담당하는 멤버를 골고루 포진 시켜 팬(시청자)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아이돌 전략 말이다. 무엇보다 ‘99즈’ 다섯 멤버 개개인의 개성이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채우고 보완하는 시너지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아쉽게도, 목요일 밤이 되면 나타나 “우리는 (손바닥 착) 99즈에요!”할 것 같은 그들과 잠시 이별을 고할 때. 시즌2로 돌아올 ‘99즈’를 기다리며 멤버/배우들에 대한 짧은 소회를 적어본다.
조정석, 유머와 보컬 담당
조정석 하면 떠오르는 것들. 납뜩이, 어떡하지 너?, 야 너두 할 수 있어. 따따따 따따.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추가됐다. 바로, 이익준. 그리고 거미라도 될 걸 그랬어. 신원호 PD는 조정석을 캐스팅하기 위해 첫 미팅 때 (조정석과 일면식이 있는) 나영석 PD까지 소환했다고 하는데, 역시 슬기로운 캐스팅 실력 보유자답다. 감정의 희로애락이 실시간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익준 캐릭터를 찰지게 요리해 낼 배우로 조정석 만한 배우가 없다는 판단이 있었을까. 그런 신원호 PD의 기대를 조정석은 1인치도 배반하지 않고 미션 클리어하듯 소화해 나갔다.
지난번 이 코너를 빌어 조정석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듯, 그는 별거 없이 흘러버릴 대사나 감정도 유머와 페이소스로 전환해내는 테크니션이다. 슬픈 상황을 신파로 빠지지 않게 하고, 오그라들 수 있는 상황을 담백하게 만들어내는 그의 재능은 <슬의생>이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빠지는 것을 여러 번 막아냈다. 웃음을 주는 연기에 최적화된 배우란 사실은 납뜩이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환자를 대할 때의 표정이나 수어로 환자의 아이와 소통하는 모습에선, 이 배우가 웃음 안에 휴머니즘도 위화감 없이 담아내는구나 싶어 일견 놀랍기도 했다. ‘99즈’ 멤버들처럼 실제 1980년대 99학번의 나이인 것도 그렇고, 뮤지컬 출신 배우로서 지니고 있던 출중한 노래 실력을 마음껏 펼쳐 보인 것도 그렇고, <슬의생>에서의 조정석은 그냥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마치, 이익준으로 살아온 것 마냥.
전미도, ‘99즈’의 정신적 지주
모르긴 해도 <슬의생>이 방영되는 동안 전미도를 아껴 온 뮤지컬/연극 팬들은 “드디어 우리 배우의 진가를 모두가 아는 날이 왔구나”라는 기쁨을 연신 음미했을 것이다. 사실, 나만 알던 배우(혹은 뮤지션)가 너무 유명해지면 팬 입장에선 이상한 허전함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 그런데 전미도는 조금 다르다. 세상 많은 사람이 그녀의 매력을 알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배우가 전미도다. 좋고 행복한 건 나눌수록 커지니까. 멀티플레이어가 귀한 21세기 연예 산업에서 전미도가 보유한 자질은 전천후다. 2006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한 전미도는 맑고 고운 음성과 강렬한 무대 장악력, 안정된 연기력과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넓고 고른 지지를 받아왔다. 탄탄한 팬덤과 티켓파워는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예. 그리고 <슬의생>으로 그녀는 연기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뮤지컬계 최고 실력자를 캐스팅하고도 그를 음치로 설정한 건 <슬의생> 최고의 재능 낭비 아닌가 의문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의구심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느낌표로 바뀌었다. 인성·실력·외모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채송화가 노래까지 잘했다면, 안 그래도 너무 완벽한 이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무릇, 사람의 매력이란 의외의 빈틈에서 튀어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전미도는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쳐서 99즈 보컬 자리에 앉은 엉뚱한 채송화를 더 매력적으로 매만졌다. 아, 천사 같은 송화를 찰떡같이 소화해 낸 모습만 보고 전미도를 예단하지는 말자. <슬의생>에서 그녀는 자신의 필살기 중 고작 한 가지를 꺼내 보인 것 뿐이니까. 연극 <메피스토>에서 (남성적인 캐릭터로 그려져 온) ‘파멸의 아이콘’ 메피스토를 맡아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기도 한 게 전미도다. 보폭을 넓힌 전미도에게 이제 필요한 건, 다시 한번 그녀가 신나게 뛰어놀 수 있게 해 줄 캐릭터다. 이 배우가 <슬의생> 외의 작품에서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설렌다.
유연석, 응답받다 짝사랑
2003년 <올드보이>로 연예계에 입문한 유연석이 대중에 깊고 넓게 각인된 건, <응답하라 1994> 칠봉이를 통해서다. 칠봉이는 유연석에게 배우로서의 보다 많은 가능성은 안겨 준 동시에, “착해서 망했다”라는 어록과 함께 ‘짝사랑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슬의생>은 그런 유연석이 신원호 사단과 두 번째 함께 하는 작품이다. 여로모로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와 <슬의생>의 안정원은 ‘신원호 월드’ 안에서 짝패다. 칠봉이로 말할 것 같으면 하숙집 친구들을 알뜰살뜰 챙기고, 어른들에게 다정다감하며,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던 너무나 착한 남자. 그런 칠봉이 <슬의생>에서는 ‘키다리 아저씨’로 진화했다. 율제재단의 막내아들 안정원은 자기 월급을 털어서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익명으로 돕는 물욕이 없는 사람. 송화의 워딩을 빌리자면 “남들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가장 행복한 남자”다.
안정원도 칠봉 못지않은 짝사랑의 아이콘이었으니, 그가 평생 바라기 해 온 건 하느님이다. 그런 정원에게 장겨울(신현빈)이라는 변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사랑을 주는 것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를 정원은 그녀를 통해 느낀다. 1994년 마지막 밤 기습 키스로 나정(고아라)에게 오랜 시간 품어 온 마음을 고백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했던 칠봉을 기억하는 ‘칠봉파’들에게, 2019년 12월 25일 기습 키스로 겨울의 사랑에 응답한 정원은 그래서 더 애틋했을지 모른다. 특히나 이 신에서 유연석이 보여준 그윽한 눈빛은 새삼 이 배우가 지니고 있는 멜로적 감수성을 돌아보게 했다. 그렇게 안정원에게 잊지 못한 겨울이 왔고, 유연석에서 또 한 번의 인상적인 필모가 새겨졌다.
김대명, 사려깊은 곰탱이
보라색 후드티에 모자를 눌러쓰고 병원을 퇴근하던 양석형 교수가 지갑을 떨어뜨린다. 그걸 본 인턴이 빠르게 지갑을 주워 건네며 하는 말. “아저씨, 지갑 떨어지셨어요!” 그렇다. 가운만 벗으면 감쪽같이 변모하는 평범함 아저씨의 얼굴. 김대명은 무리에서 도드라지는 개성 있는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얼굴이다. 그런데 이것이 김대명의 장점이라, 평범한 듯 보이는 얼굴에 미묘한 정서가 스밀 때의 파장이 강렬하다. 석형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도 ‘놀람’ ‘난처함’ ‘기쁨’ ‘멍함’ 등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게 김대명이다. 그래서 석형은 고요한 듯하지만, 뜨겁게 느껴졌다. 곰탱이와 같은 소심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건 김대명이 전작들에게 입증해 온 자질이기도 하다.
대중이 김대명을 처음 인지한 건, 그의 얼굴이 아닌 목소리였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목소리 하나로 극 중 하정우가 연기한 윤영화의 손발을 꽁꽁 묶었던 수화기 너머의 테러범. 영화에 얼굴을 단 한 차례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해 인상적인 빌런 중 한 명으로 기억됐다. 연약함과 냉소를 오가는 알 수 없는 음성, 나이를 지운 듯한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므로. 그리고 우린 김동식을 만났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예, 원인터내셔널 영업3팀 김동식입니다”라고 외치고 있을 것 같은 <미생>의 수더분한 김동식 대리. 장그래(임시완)에게 더없이 자상했던 선배 말이다. 테러범과 김동식 사이의 낙차가 증명하듯, 김대명은 보여줄 게 많은 배우다. 동글동글한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을 담아낼 줄 아는 그는 추민하(안은진)와의 관계에서 보여줬듯 멜로도 된다. <슬의생> 마지막 회가 방송된 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이름이 윤신혜임을 기억하자. 양석형의 전부인 이름이다. 시즌2에서 김대명은 더 다채로운 감정선을 꺼내 들 게 분명하다.
정경호, 심쿵 포인트 보유자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에 대답할 차례. 고백하자면, <슬의생>을 보면서 가장 애착을 가졌던 배우는 김준완을 연기한 정경호다. 뭐랄까. 새롭게 등장한 배우 같았달까. 정경호는 잘 생겼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배우는 아니었다. 멋들어진 캐릭터도 많이 연기했고, 그가 중심에 서는 작품도 많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고 흐릿하게 인상만 남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라이프 온 마스>를 안 봤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길.) 그래서 <슬의생>에서의 정경호는 반전이었다. 정경호가 이토록 다양한 얼굴을 품은 배우였나? <슬의생>에서 정경호는 누구와 붙여놓아도 쫄깃한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완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익준과 붙어 티격태격할 때의 그는 물가에서 떼쓰는 ‘초딩’ 같았고, 송화를 배신한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 일격을 가할 땐 세상 든든한 오빠 같았으며, 여자친구 비둘기 씨와 있을 땐 이토록 자상할 수 없는데, 레지던트 도재학(정문성)과 있을 땐 박력 보스와 츤데레를 오갔다.
멤버들 중 가장 까칠한 면모를 보이는 준완은 가장 자주 ‘심쿵 포인트’를 안겨 준 인물이기도 했다. 결혼식을 앞둔 딸 때문에 수술을 미뤄 달라는 환자에게 냉정하게 굴어 “싸가지 없는 의사”라는 말을 들은 준완이 은갈치 양복을 빌려 입고 몰래 딸의 결혼식장을 찾는 모습에 ‘심쿵’, 전세 사기에 감봉 위기까지 처한 재학을 뒤에서 몰래 돕는 모습에 ‘심쿵’, 익순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오빠랑 연애하자”라고 고백하는 박력에 또 ‘심쿵’했더랬다. 까칠하고 예민하고 개인주의적인 면이 많은 이 캐릭터가 밉기는커녕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정경호가 부여한 인간적인 면이 크다. 그러고 나니, 전작에서의 정경호도 새롭게 보인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첫 주연을 맡은 박해수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받쳐 준 정경호가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앙상블을 중시하고,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는 아마도 정경호의 심성이 반영된 면이 클 테다. 그러한 정경호의 진면목이 <슬의생>과 좋은 궁합으로 실현된 게 아닐까. 아이돌 멤버로 본다면, 초반엔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든든한 팬덤을 구축할 경우다. 이제 정경호는 더 이상 잘생기기만 한 피사체가 아니다. 대중이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을 품은 얼굴이 됐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