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기억이란 건 얼마나 부정확한지. 난 지금껏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을 떠올릴 때마다 길동(윤균상)과 그의 익화리 동지들이 임금 연산(김지석)의 군대와 맞서 결사항전을 하던 대목부터 떠올리곤 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확인해 보니, 길동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했던 건 드라마가 후반에 든 뒤의 일이었다.

물론 중반부터 탐관오리들을 때려잡고 백성들을 돕긴 했지만, 길동이 처음부터 그 길을 걸으려 했던 건 아니다. <역적> 속 길동은 성질 죽이고 고개를 숙인 채 평범한 방물장수로 살아 보려 하기도 했고, 건달패 수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아버지 아모개(김상중)를 설득해 조용히 농사나 지으며 살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부패한 양반들을 혼내주는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랬다. 저 나쁜 몇몇 양반님네들을 혼쭐을 내주면 좀 살 만한 세상이 오려나. 그런 양반이 한 둘이 아니구나 깨달은 후에도 길동은 나라를 향한 최소한의 신뢰를 놓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르니까 나랏님이 가만히 계시는 거지, 사악한 양반님네들의 비행이 기록된 책만 제대로 보여드리면 백성들을 져버리진 않으실 거라고 길동은 믿었다. 연산이 어떤 종류의 군주였는지 후대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만, 구중궁궐 안에 들어앉은 임금의 마음을 길동이 어찌 알았으랴.

그리고 길동은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온 몸의 뼈가 바숴진 뒤에야 깨닫는다. 나랏님부터 벼슬아치, 양반님네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백성을 탄압하는 세상과 맞서 싸우려면 때론 칼을 들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래야 비로소 상대가 말을 들을 테니까. 시청자들은 길동이 칼을 휘두르고 활시위를 당기며 활약하는 것을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길동은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핏대 세우는 일 없이 순명하며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어서 힘을 쓴 거지.

새삼 <역적>을 떠올린 건, 조지 플로이드 때문이었다. 비무장한 시민 조지 플로이드는 2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폐소공포증 때문에 경찰차 뒷자리에 탑승할 수 없다고 말했다가 미네아폴리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을 거뒀다.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은 수갑을 차고 땅에 엎드려 제압된 상태인 플로이드의 목을 자신의 무릎으로 8분 46초 동안 찍어 눌렀고,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 없다”고 반복해서 호소하다가 숨을 거뒀다.

이 과정은 사태를 지켜보며 경찰관들에게 항의하던 시민이 찍은 동영상으로 남아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플로이드는 무장하지 않았고,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으며, 경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지금껏 경찰이 과잉진압을 정당화할 때마다 써먹었던 그 어떤 핑계도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행위를 목격한 이들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분노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태평양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바로 와 닿지 않아서 그런지, 미국 내 #BlackLivesMatter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뜨뜨미지근하다. 한국이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운 나라라는 오랜 착각 때문일 수도 있고, 제1세계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일인데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시위대가 지나간 자리에 약탈과 습격, 방화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무리 정당한 의도를 가지고 한 집회라도 폭력적으로 변질된 집회라면 그걸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 2016년 촛불집회를 보라”고 훈수를 둔다.

하지만 2016년의 우리와 2020년의 미국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당장 경찰이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고무탄을 발사하고, 최루가스를 뿜어대고, 경찰차를 몰아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방패로 밀어 쓰러뜨리는 상황을 보면서도 ‘비폭력 평화시위’를 하라고 훈수를 두고 싶은가? 그게 ‘비폭력 평화시위로 정권을 바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자뻑에 취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역적>의 길동과 그의 익화리 동지들도 그랬다. 가능한 한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했지만, 그 모든 시도가 좌절된 뒤에는 칼을 드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대화를 나눌지 아니면 맞서 싸울지는, 저항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 정해주는 법이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임금이 본을 세우겠다며 군마를 보내 멀쩡한 고을 하나를 다 학살하겠다고 날뛰는데, 그 상황에서 ‘거 나랏님 우리 말로 하십시다’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역적> 속 길동과 익화리 동지들은 백성들을 괴롭히던 수괴인 연산이 몰락하자, 오래 꿈꿔왔던 것처럼 볕 좋고 물 맑은 곳으로 숨어들어가 평화롭게 살았다. 지금 바다 건너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이라고 다를까. 만연한 인종차별과 경찰폭력, 불의한 사법시스템이 진정 개혁된다면, 마침내 정의가 이뤄진다면, 이들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 것이다. 길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