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영화 <로얄 테넌바움>(2001)의 홍보문구였던 이 문장을 나는 참 많이도 좋아한다. 실로 그렇지 않던가? ‘가족’이란 말을 중얼거릴 때마다, 단어 하나에 다 담는 게 불가능할 만큼 많은 정보가 넘실대며 밀려오니까. 평범해 보이는 가족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남모를 사연과 고민, 자기들끼리도 나누지 못해 속으로만 곪아가는 비밀들이 가득한 법이다. 물어보기 쑥스럽고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워서 차마 꺼내지 못한 질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날 수화기 너머에서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건지, 파리한 얼굴과 처진 어깨로 날 맞이했던 그날 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러니 ‘가족’은 단순히 단어일 수 없다. 가족은 감정이고 비밀이며, 가족은 사연이고 사건인 동시에 유예된 질문이자 거짓인 줄 뻔히 아는 거짓말이다. 가족은 문장이다.
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속 김 씨네 일가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집안도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현대 한국의 가족처럼 보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틀어져 말을 안 나눈 지 오래되었고, 큰딸과 작은딸도 사이가 틀어져 말을 안 나눈 지 몇 년 되었고, 큰 딸네 부부도 무슨 일인지 밥상머리 식사 자리에 찬바람이 냉랭하니 쌩쌩 불고, 장성한 막내아들은 가족 구성원들 눈치를 슬슬 살피며 넉살 좋게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맞다. 평범하다. 이혼은 복잡하고 오래 걸리니 졸혼을 하자는 아내 진숙 씨(원미경)의 요구에 화를 버럭 내면서도 그러자고 수긍하는 남편 상식 씨(정진영)를 보면, 잘은 몰라도 이 집안도 감정이 닳을 대로 닳아 없어졌구나 싶다. 서로 상처 입고 상처 입혀온 세월이 너무 길어 이제 더 다칠 곳도 안 남은 집 특유의 익숙한 정적이 이 집에도 있다.
그런데 그 정적은, 졸혼을 앞두고 비관 자살을 시도했던 상식 씨가 기억을 까맣게 잃은 채 정신을 차리면서 의도치 않게 깨진다. 집안의 불화에 크게 기여했던 폭력적인 가부장 김상식 씨의 기억 말고, 어떻게 하면 ‘숙이 씨’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서툰 애정 고백을 일삼던 스물두 살 푸르른 청년 상식 씨의 기억만 가지고 눈을 떠버린 것이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서 아름답고 죄 없던 시절로 돌아가 눈을 뜬 게 야속하지만, 기억을 못 한다는데 무책임하다고 나무랄 수도 없는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미묘한 불화의 흔적을 읽어낸 상식 씨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가족’이라는 문장을 읽어내려 발버둥 친다.
상식 씨가 뻔히 알던 문장을 원점에서 다시 배워 나가는 동안, 시청자들과 김 씨네 일가 또한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간다. 졸혼해서 혼자 살면 엄마는 대체 뭐 하고 살 수 있냐는 큰딸 은주(추자현)의 다그침과 달리, 진숙 씨는 나름대로 이후의 삶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겉보기엔 근사해 보이던 은주와 그의 의사 남편 태형(김태훈)의 사이는 알고 보니 거짓과 회피로 가득한 관계였다. 그리고 상식 씨는, 아무래도 다른 여자와 가정이 있었던 것 같다. 자꾸 가족들 앞에서 물건을 부수고 폭력을 저질렀던 것 같다. 자기가 일이 힘들다고 가족들에게 함부로 굴었던 것 같다. 그간 자기감정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한 일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가 없던 상식 씨는, 이제 그 모든 감정을 잊고 오로지 일어난 일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상식 씨는 탄식하고, 탄식한 뒤에 웃으면서 진숙 씨에게 말한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과 살아줘서 고마웠다고. 이제, 바라는 대로 졸혼하자고.
문장이란 게 참 재미있는 게, 남이 쓴 비문과 오탈자는 찾기가 쉬운데 정작 내가 쓸 때는 실수를 찾기 어렵다. 내 머리와 감정을 통과해서 나온 문장인 탓에 객관적으로 읽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나중에 활자로 인쇄된 결과물을 본 뒤에야 아차 싶은 게 문장이다. ‘가족’이란 문장도 그럴 것이다. 내가 미처 모르는 비밀과 거짓말, 서로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안개처럼 둥둥 떠다니는 이 복잡한 문장을, 우리는 각자의 머리와 감정을 통해 읽어내고 나름대로 번역한다. 그래서 가족의 일은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고, 내가 저지른 실수도 알아채기 어렵다.
글을 오래 써 온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어색하지 않은 문장을 쓰는 데에 남들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는 것만 한 방법도 별로 없다. 이 문장, 보기에 어색하지 않아? 잘 읽혀? 가족도 문장이라면, 해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이란 문장을 이렇게 읽고 있는데, 당신 보기엔 좀 어때? 아빠는,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아마 우리에겐 상식 씨처럼 제 감정을 말끔히 잊어서 가족을 처음 만난 문장처럼 검토할 수 있는 행운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함께 문장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검토해달라고 물어가며 같은 이해에 도달하려 노력해 볼 수는 있겠지.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