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드라마 <호텔 델루나> 제작진의 최대 실수는 ‘카메오 김수현’을 마지막 회 에필로그에 활용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김수현으로 하여금 드라마 문을 닫게 한 셈인데, 그것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떤 파장? 김수현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파장. 그의 군 제대 후 첫 행보였던 만큼 반응의 진폭은 컸다. 드라마가 끝난 후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김수현을 중심으로 재편됐으니, 이로 인해 <호텔 델루나>의 여운은 옅어졌고 아이유와 여진구에게 돌아가야 할 스포트라이트도 분산됐다. 오죽하면 “김수현의 임팩트 너무 커서 에필로그가 본편을 잡아먹은 느낌”이라는 류의 평들이 쏟아졌을까. <호텔 델루나> 제작진의 선택이 확실하게 증명해 준 건 하나 있다. 김수현이라는 배우의 존재감. 그리고 김수현의 스타성은 영화 한 편 고꾸라졌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잊힐 함량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수현의 스타성.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을 2009년 방영된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에서부터 눈치채기 시작했다. 아역배우에서 성인 연기자로의 바톤 터치가 이뤄지는 구조의 드라마에서는 대개 시청자가 성인 배우의 등장을 오매불망 기다리기 마련인데,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고수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차강진(고수)의 아역을 연기하는 배우, 신인 김수현 때문이었다. “관심은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 네가 눈에 들어오네”라고 유혹을 건네는 김수현의 대사는, 김수현을 발견한 시청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 같기도 했다. 소년성을 위협하지 않는 와중에 소년의 경계를 훌쩍 추월해 버리는 이중적인 매력. 어린 차강진의 2회를 끝으로 아쉽게 퇴장했지만, 배우 김수현은 깊게 각인됐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로 도움닫기 한 김수현은 이후 하강을 모르는 계단식 여정을 밟았다. 놀라운 건 가속도였다. 2010년 드라마 <드림하이>에서 ‘농약 같은 머스마’의 매력을 흘린 김수현은 조선 시대 가상의 임금 이훤을 연기한 <해를 품은 달>을 통해 시청률을 품고, 스타라는 수식어를 품고, 광고를 품고, 여심을 품었다.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 김수현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한가인이 연기한 연우였는데, 시청자들은 그 명이 제 것인 것 마냥 자진해서 받아버렸다. 첫사랑을 향한 순도 높은 순정과, 권력을 탐하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왕의 고독을 섬세하게 담아낸 김수현의 얼굴은 여성의 로망과 모성애를 동시에 저격했다. “내 옷고름 한 번 풀어 주지”라고 쏘아붙일 때 슬쩍 새어 나오는 나쁜 남자의 매력 또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해를 품은 달> 방영 전에 <도둑들> 촬영을 마친 최동훈 감독은 “이럴 줄 알았으면 ‘수현 씨 분량을 더 많이 찍어둘걸’ 후회했다”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단순 농담이 아닐 수 있었겠다, 느낀 건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보면서였다.
극장을 찾았다가, 콘서트 현장에 온 게 아닌가 혼동했던 기억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이 우산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자 극장 안에 비명이 터졌을 때. 그리고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김수현이 동네 바보 방동구에서 특수공작원 원류환으로 환골탈태하자 객석에서 ‘어머, 어머’ 신음이 새어 나왔을 때. 두 영화 모두 배우의 매력이 흥행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스타가 흥행에 미치는 영향’을 돌아보게 했다. 특히 <은밀하게 위대하게> 시나리오가 품은 약점은 본의 아니게 김수현의 연기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너끈히 해치우며 말이 되게 만드는 김수현의 저력은 전국 695만 관객을 불러 모은 일등 공신이었다. 김수현의 스타성은 <별에서 온 그대>에서 다시 한번 증명됐고, 그 증명을 통해 한층 강화됐다. <별에서 온 그대>를 타고 불어온 한류 바람은 김수현을 그가 예상한 곳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중국의 한 예능프로그램은 김수현을 섭외하기 위해 전세기를 띄우기도 했으니, 그 인기란.
5년을 이어진 불패 신화. 점점 커지는 주위의 관심과 기대. 이런 경우에 찾아오는 심리적 부담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즈음 김수현은 볼링에 빠졌다. 2017년 <무한도전>에 출연한 김수현은 볼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대하고 싸우는 게임이 아니라 혼자만의 싸움이 되는 게임.” 어느 순간 김수현에게 연기는 볼링과 같지 않았을까. 그리고 영화 <리얼>이 개봉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리얼>은 실패 없이 달리던 김수현에게 걸린 급브레이크였다. 김수현의 스타성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던 만큼 김수현이 감내해야 할 것도 많았다. 김수현에게 <리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가정법은 그다지 영양가 있는 것이 아니니, 질문을 바꿔보자. 김수현에게 <리얼>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리얼>의 차기작이자, 그의 전역 복귀작인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이에 대한 힌트가 있을 것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김수현의 마음을 잡아당긴 이유에 말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1회 소제목은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이다. 동화작가 고문영(서예지)이 쓴 동화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의 소년은 김수현이 연기한 정신병동 보호사 문강태의 은유적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차피 어디론가 떠나야 하기에 깊은 인연은 만들지 않는 문강태는 “사는 게 죽을 만큼 힘들면, 도망이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온 인물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처절하게 도망 중인 문강태에서 고문영은 “트라우마는 앞에서 마주봐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톱스타 K(<드림하이>), 조선의 임금(<해를 품은 달>), 한탕을 노리는 도둑(<도둑들>), 남한에 잠입한 북한의 이방인(<은밀하게 위대하게>), 심지어 400년 전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었던(<별에서 온 그대>) 김수현에게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강태는 상대적으로 밑바닥에 발붙은 캐릭터다. 기존의 캐릭터들이 상대방의 고달픈 삶을 껴안아주며 판타지를 제공했다면, 문강태는 자신의 삶이 고단해 누굴 알아줄 여력이 (아직까지는) 없는 남자다. 비범한 능력의 캐릭터를 저글링하며 대중과 소통해 온 김수현은, 이번엔 상처 입은 캐릭터를 통해 공감을 나누려는 인상이다. 3년 만에 돌아온 김수현은 작품 안에서 그렇게 권능을 버리고 밑바닥에서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얼굴로.
글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