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감독 1세대, 박남옥 감독과 홍은원 감독

해를 거듭할수록 영화 산업에서 여성 감독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두터워지고 있다. 한국영화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 사이, 장편영화를 두 편 이상 개봉시킨 여성감독들 가운데 10명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변영주

변영주 감독은 제주도 매춘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을 촬영하던 중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성매매에 나선 이를 만난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됐다. '나눔의 집'에 모여사는 할머니들의 삶을 1년 반 동안 기록한 <낮은 목소리>(1995)는 극장에서 정식 개봉된 최초의 한국 다큐멘터리로서 관객들을 만나 위안부 성착취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내는 데에 일조했다. <낮은 목소리>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역사적 의미보다 할머니들의 현재 일상에 초점을 맞춘 <낮은 목소리 2>(1997), 할머니가 또 다른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방식을 취한 <낮은 목소리 3: 숨결>(1999)이 제작됐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마친 변영주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으로 눈을 돌려 스스로 "여성주의 <애마부인>"이라 소개한 <밀애>(2002), 윤계상 김민정과 함께한 청춘영화 <발레 교습소>(2004)를 만들었다. 기대보다 반응이 밋밋했던 전작과 달리, 8년 만에 내놓은 <화차>(2012)는 김민희의 열연과 원작소설의 파격적인 소재로 흥행과 비평면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현재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조명가게>를 준비 중에 있다.


임순례

프랑스 파리 제8대학에서 영화학 석사를 취득한 임순례 감독은 한국에 돌아와 여균동의 <세상 밖으로>(1994)의 조연출로 충무로에 입성하고, 단편영화 <우중산책>(1994)을 발표해 제1회 서울 단편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세 남자가 사회에서 어떻게 매몰되는지 그린 <세 친구>(1996)에 이어 발표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는 고등학생 때 함께 밴드를 했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각자 어렵사리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건조하되 절절하게 그려내 극찬 받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준우승한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실화를 영화로 옮긴 세 번째 장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은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만났다. 옴니버스 영화 <날아라 펭귄>(2009)과 공효진과 협업한 저예산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으로 대안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후, 일본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남쪽으로 튀어>(2012)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스캔들에서 모티브를 얻은 <제보자>(2014)를 발표하는 등 다양한 연출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일본영화를 리메이크한 <리틀 포레스트>(2018) 역시 소소한 반응을 일으켰다. 황정민, 현빈과 함께하는 신작 <교섭>은 국내 촬영을 마치고, 요르단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정향

미술관 옆 동물원. 이 묘한 제목을 가진 이야기는 청룡영화제 공모전에서 당선되면서 잘 쓴 시나리오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큐멘터리와 연극을 연출하고, 이장호 감독의 <천재선언>(1995)의 조감독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신인감독 이정향은 자신이 쓴 이 시나리오를 통해 입봉했다. 시나리오에 대한 좋은 반응 덕분에, 애초 독립영화 규모로 제작하려 했던 계획과 달리 90년대 말 최고의 여성 배우로 군림하던 심은하와 TV 드라마 <거짓말>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인 이성재를 캐스팅해 촬영할 당시부터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고, 주인공 다혜(심은하) 캐릭터가 발산하는 매력으로 뭇 관객을 사로잡았다.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거의 모든 신을 영화 출연은 처음인 아역배우 유승호와 비전문 노인 배우 김을분 둘로만 진행한 <집으로>(2002)는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자극하면서 2002년 한국영화 2위에 해당하는 '대박'을 기록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의 연이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정향의 필모그래피는 지난 18년 사이, 용서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던진 <오늘>(2011) 한 작품만 보태졌다.


정재은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2001년 10월 개봉해 극장가를 장악한 조폭영화들에 밀려 흥행에 실패한 또 다른 영화가 있다.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다.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등을 캐스팅해 인천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친구들이 통과하는 스무살의 시간을 품은 <고양이를 부탁해>는, 학교를 벗어나 서로 떨어져 지내다 종종 만남을 가지면서 변해가는 관계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이미지와 음악으로 적지만 든든한 관객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 돋보이던 젊은 배우들의 얼굴을 통해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청춘을 담은 <태풍태양>(2005)은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를 맞닥뜨려야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신작을 내놓지 않던 정재은은 건축가 故 정기용의 마지막 나날을 보여주는 <말하는 건축가>(2011), 건축가 유걸이 설계한 서울시 신청사가 대중에게 공개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3) 등 건축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면서 창작의 길을 모색했다. <러브레터>(1995)의 나카야마 미호와 김재욱이 호흡을 맞춘, 13년 만의 새 극영화 <나비잠>이 2018년 9월 개봉했다.


박찬옥

단편 <있다>(1996)와 <느린 여름>(1998)로 걸출한 연출력을 보여준 박찬옥 감독은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의 조감독을 거쳐 장편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3)을 발표했다. 기형도의 시를 모티브로 삼은 <질투는 나의 힘>은 대학원생 원상(박해일)이 자기가 사랑하는 두 여자(배종옥)와 사귀는 중년의 잡지 편집장 윤식(문성근)에게 질투를 느끼는 기묘한 관계를 연출한 수작. 피식피식 실소가 터지다가도 어느새 묘한 서늘함이 남는, 한국영화에서 전에 보지 못한 터치였다. 하지만 박찬옥의 두 번째 장편 <파주>(2009)는 그로부터 6년 후에야 도착했다. 기교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곧 스타일 같았던 <질투는 나의 힘>과 달리, <느린 여름>을 작업한 바 있는 촬영감독 김우형과 다시 만난 <파주>는 눈을 홀리는 신들이 여럿 눈에 띈다. <질투는 나의 힘>이 내면의 펄떡이는 질투를 다뤘음에도 인물 대부분이 건조하게만 보였다면, <파주>의 두 주인공은 서로 마음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이따금씩 삐져나오는 감정들은 격정적이었다. 11년째 창작 활동은 멈춰진 가운데, 2010년대 중반 즈음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책임을 담당했다.


방은진

이제는 감독 칭호가 더 익숙한 방은진은 임권택의 <태백산맥>(1994) 조연배우로 처음 영화계에 데뷔해 <301 302>(1995), <학생부군신위>(1996), <수취인불명>(2001), <로드 무비>(2002) 등 문제작들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2004년 단편 <파출부, 아니다>(2004)를 연출한 그는 감독으로 재능을 알아본 제작자 명계남의 제안을 받아 <오로라 공주>(2005)로 입봉하게 됐다.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크게 인정받은 엄정화를 원톱으로 내세워 딸을 잃은 복수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후 연기와 단편 연출을 병행하던 방은진은 일본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옮긴 <용의자 X>(2012)와, 이듬해 프랑스에서 마약 운반범으로 몰려 2년 넘게 복역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으로 가는 길>(2013)을 연이어 발표해 7년간의 공백을 만회했다. 최근작은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펼쳐지는 동성 로맨스 <메소드>(2017)다.


이언희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시나리오에 참여한 이언희 감독은 <장화, 홍련>(2003)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배우 임수정이 시한부를 선고받은 고등학생을 연기한 로맨스 <...ing>(2003)을 통해 27살 나이에 장편 신고식을 치렀다. 30대 초반의 두 여자를 중심으로 연애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낸 <어깨너머의 연인>(2007) 이후 오랫동안 신작 소식이 뜸하다가 공효진과 엄지원 주연의 스릴러 <미씽: 사라진 여자>(2016)로 9년 만에 복귀했다. 아이를 잃어버린 워킹맘 지선(엄지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아이를 납치한 조선족 보모 한매(공효진)의 처참한 삶을 교차하면서 기묘한 여성 연대를 그려냈다. 가히 재발견이라 할 만한 공효진의 연기는 관객의 마음을 한매에게 돌리게끔 만들었다. 지난 세 작품을 여성 캐릭터로 이끌어갔던 이언희는 쏠쏠한 성공을 거둔 바 있는 남성 버디무비 <탐정: 더 비기닝>(2015)의 속편 <탐정: 리턴즈>(2018)를 연출하기도 했다.


김희정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서 수학하며 만든 단편들로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된 김희정 감독은 진짜 엄마를 찾아 나선 13세 소녀의 이야기 <열세살, 수아>(2007)로 데뷔했다.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2011)은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경유해 일상 속에 감춰진 불안과 개인의 상처에 주목했고, 전주국제영화제의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설행: 눈길을 걷다>(2015)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원을 찾은 남자와 수녀의 교감을 담아냈다. 과거의 기억이 현실에 끼어들면서 아픈 기억에서 치유되는 것에 대한 김희정의 오랜 관심은 지난 6월 개봉한 김호정 주연의 <프랑스여자>(2019)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경미

이경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박찬욱이다. 2004년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은 <친절한 금자씨>(2005)에 이경미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에 최우수작품상을 안기고, <친절한 금자씨>(2005)의 스크립터로 기용했다. 이경미의 첫 장편 <미쓰 홍당무>(2008)는 박찬욱이 시나리오를 쓰고 그가 운영하는 모호필름에서 제작을 맡았다. 전대미문의 여성 캐릭터 양미숙(공효진)이 이끌어가는 영화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시종일관 출몰하는 조소 안에 녹여냈다. 7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장편 <비밀은 없다>(2016)는 이경미 특유의 해괴하게 뒤틀린 유머와 서스펜스를 한껏 더 밀어붙인 작품이었다. 처음 보는 손예진의 낯선 얼굴들이 모여 실종된 딸을 어리숙하고 무모하게 찾아헤매는 연홍의 이상한 여정에 응원을 보내게 된다. <비밀은 없다>는 비록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이경미는 이영애 아이유와 함께 각각 다른 단편을 작업하고, 에세이집 <잘돼가? 무엇이든>이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등 웬만한 스타 감독 못지않은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윤가은

여자 아이와 여름. 윤가은 감독의 작품들을 가로지르는 절대적인 키워드다. 아빠의 내연녀 집에서 만난 어린 남매와 시간을 보내는 고등학생의 이야기 <손님>(2011)과 7살 보리가 할아버지 제삿날에 콩나물을 사오는 심부름의 여정을 따라가는 <콩나물>(2013) 두 단편만으로 윤가은은 독립영화계 스타로 떠올랐다.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5) 역시 여름방학을 맞은 여자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우리들>은 두 동갑내기 사이의 우정이 만개하고 시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그 주변에 사랑스러운 조연들을 배치해 장편영화의 긴 호흡을 체득했다. 학교 안팎의 친구 사이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지독히 날카로울 수 있는지 세심하게 구현한 영화에 찬사가 잇따랐다. 우연히 동네에서 만난 12살 하나와 그보다 어린 두 자매가 각자 자기의 'home'과 'house'를 지키고자 애쓰는 걸 적절한 온기로 그린 <우리집>(2019)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