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장삼이사들이, 그의 곁에서 진상필과 최인경이 되어준다면 어떨까.
2009년 여름이었다. 말년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탄 나는 하염없이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경기도로 진입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시야 왼편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풍경이 들어왔다. 연기 주변에 헬기들이 맴돌며 뭔가를 뿌리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사태가 심각한 거 같았다. 큰 화재라도 난 걸까?
버스가 연기에 가까워진 뒤에야 알았다. 그곳은 해고노동자들이 사측의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저항하며 옥쇄투쟁을 벌이던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이었다. 내가 물을 뿌리는 소방헬기라고 생각했던 건 최루액을 뿌리던 경찰 헬기였고, 화재로 일어난 연기인 줄 알았던 건 사측 노동자들이 폐타이어를 태워 내뿜은 유독가스였다. 내가 본 건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내쫓기 위해 경찰과 사측 노동자들이 합심해 하늘과 땅 양쪽에서 사람의 숨통을 막는 광경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길에 올랐던 그 아침에 본 광경을 난 아직 잊지 못한다. 내가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는 사람이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먼 발치에서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그 공포는 잊을 만하면 다시 살아 돌아와 사람을 괴롭힌다. 나도 그랬는데, 그 안에 있던 이들이 느꼈을 공포와 고립감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6년이 지난 2015년, <정도전>(2014)을 만든 강병택 CP와 정현민 작가가 재회해 함께 정치드라마 <어셈블리>를 선보였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1회부터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을 하는 수리조선소 노동자들이 빨간 조끼를 입고 우르르 등장한 그 작품은, 2회에는 복직투쟁을 이끌던 전 복직투쟁위원장 배달수(손병호)가 밤의 적막 속에 혼자 사다리를 타고 타워크레인 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내보냈다. 올라가야 할 곳은 너무 멀기만 한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것도 까마득한 사다리 중간 참에서, 배달수의 표정은 세상 더 없이 외로워 보였다. 정체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을 운동의 도구로 삼는 이들이 느낄 고독은 무엇일까.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 CF가 나오고 그 다음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까지 TV 앞을 뜨지 못했다.
충격은 나만 받은 게 아니었다. TV 드라마에서 보게 될 줄 몰랐던 장면이기에 충격이었고, 더 본질적으로는 각자의 기억 속에 담겨있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장면이었기에 충격이었다. 누군가는 가장 직접적인 레퍼런스인 한진중공업을 떠올렸을 테고, 누군가는 용산의 망루를, 누군가는 재능교육을, 또 누군가는 스타케미칼과 C&M을 떠올렸을 것이다. 더 이상 걸 수 있는 게 없어서 제 목숨과 안녕을 담보로 걸고 천길 고공에 올라 투쟁하는 이들의 역사가 너무 길고도 유장한 탓이다. 나는 2009년에 보았던 검은 연기 기둥과, 2014년 말부터 2015년 봄까지 바로 그 평택 쌍용차 공장 굴뚝 위에 올라가 투쟁했던 이창근과 김정욱을 떠올렸다.
보수 여당의 이미지 쇄신용 간판 겸 거수기 역할로 동원되어 국회의원이 된 진상필(정재영)은, 배달수의 유지를 잇기 위해 제 정치생명을 모두 다 걸고 달린다. 정직하게 살아가다가 하루 아침에 해고당해 희망과 자존을 모두 잃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줬더라면 배달수도 그 높은 고공에 올라가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니 실직자·파산자의 재기를 위한 지원법 제정을 위해 힘 써달라고. 세상을 떠난 동지의 이름을 붙인 ‘배달수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진상필은 제1야당 당대표 집 앞에서 노숙을 자처하고, 무릎을 꿇고 표결에 협조해 줄 것을 애원하기도 한다. 배달수와 함께 수리조선소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을 하던 가락 그대로.
물론 여의도엔 진상필처럼 법안 하나 만들겠다고 의원직부터 시작해 모든 걸 걸고 투쟁하는 의원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런 방식의 의정활동이 지속 가능한 책임정치라는 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최인경(송윤아)처럼 청와대 선임행정관까지 역임했던 정치 엘리트가 풋내기 초선의원의 열정 하나에 반해 그 모든 고난을 다 함께 하는 사례도 현실에선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분명 자기 자신이 국회 보좌관 출신이었기에 국회의 속살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정현민 작가가, ‘이런 정치를 보고 싶다’는 희망을 담아 만들어낸 동화 같은 캐릭터 설정이었으리라.
현실 세계에 진상필도 최인경도 없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서 진상필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을 발굴해서 국회로 보내야 하는 걸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 줄 알고? 그런 판타지보다 조금은 더 가능성이 있는 길을, 나는 알 것도 같다. 평범하게 하루치 노동을 하고 주말이 되면 소파에 늘어지는 우리 장삼이사들이 마음을 모아 현실 속 배달수의 곁에서 든든한 ‘빽’이 되어주는 게, 진상필 같은 사람을 찾아내어 국회로 보내는 것보단 더 빠를 것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복직투쟁이 한참이다. 1986년 당시 대한조선공사 노조의 어용 집행부를 고발하는 홍보물을 배포했다가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부당해고를 당한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 뒤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2003년 한차례 복직 논의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보다 다른 조합원들의 복직을 먼저 요구했고, 2011년엔 생산직 400명 정리해고 방침 철회를 요구하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간의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부당해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올해가 정년일 김진숙 지도위원은 현재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의 마지막 해고노동자다.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그의 곁에서 진상필과 최인경이 되어준다면 어떨까.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