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같은 사람이 아닐 텐데, 마치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은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흥행판에서 종종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배급 담당자들은 난감할 뿐만 아니라 해법 또한 복잡해집니다. 앞서 개봉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뒤로 가는 것이 좋을지? 어느 쪽이 흥행에 더 유리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앞서 개봉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흥행판입니다. 앞서 개봉을 택하였다가 영화가 조금이라도 약하다는 소문이 나면 관객들은 그 즉시 주머니를 닫고 뒤 영화를 기다리는 상황이 될 것이고, 뒤로 개봉을 선택하였다면 앞선 영화의 흥행을 바라보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애간장을 태워야 할 것입니다. 앞선 영화가 잘돼도 걱정이고 안 돼도 걱정이지요. 잘되면 내 것은 안 될 것 같고, 안되면 내 것도 안 될 것 같고.
그 소재나 주제에 있어 유사 값에 차이는 있지만, 올 초 <해치지않아>, <미스터 주: 사라진 VIP> 거기에 <닥터 두리틀>까지 그 흔치 않은 동물(출연) 영화가 2주 차이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장 먼저 개봉된 <닥터 두리틀>이 161만, 한주 뒤에 개봉된 <해치지않아>는 122만, 그 한주 뒤에 개봉된 <미스터 주: 사라진 VIP>가 60만, 이 경우는 먼저 개봉한 것이 유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2년에 개봉된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은 제작 초부터 서로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인지했었죠. 그래서 원래는 <나는 조선의 왕이다>였던 제목을 너무 유사한 느낌이 난다해서 <광해, 왕이 된 남자>로 바꾸기까지 하면서 밀어붙입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8월 8일 여름시즌을 택하였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9월 13일 추석시즌을 노립니다. 시장은 추석시즌 보다 여름시즌이 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왕이로소이다>은 79만,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그것에 10배가 넘는 1232만을 합니다. 유사한 영화치고는 차이가 컸던 영화였습니다.
좀 더 과거로 가보겠습니다. 2000년에 소방관을 다룬 영화가 동시에 두 편이 나옵니다. 바로 <싸이렌>과 <리베라 메>입니다. <싸이렌>은 10월 28일, 그리고 <리베라 메>는 11월 11일로 두 영화의 개봉차가 2주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싸이렌>은 서울관객(당시에는 전국스코어 집계가 불가능하였습니다.) 6.2만. <리베라 메>는 53만을 기록 합니다. 앞서 개봉할 경우의 단점을 그대로 보여 준 경우라 하겠습니다.
외화의 경우는 1997년과 1998년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왕창 쏟아져 나왔으니 말입니다. 화산폭발을 다룬 두 영화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 똑같이 개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바람에 아이들마저 분별하지 못한 <개미>와 <벅스 라이프> 그리고 당시 최고의 블록버스터급 경쟁을 치른,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을 그린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은 각각 1997년 3월 22일 그리고 5월 17일 개봉됩니다. <단테스 피크> 서울관객수 25만, <볼케이노> 39만으로 역시 뒤에 개봉된 영화가 흥행이 되었는데. 북미와는 정반대 상황이 발생한 케이스입니다. 북미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2월 7일이 개봉된 <단테스 피크>는 6713만 달러를 그리고 4월 25일 개봉된 <볼케이노>는 4932만 달러를 기록 했습니다. 국내와 달랐던 이유는 국내 3월 시장이 워낙 비수기 시장이라 그렇지 않았을까 판단됩니다.
1998년 11월 7일 <개미>가 개봉되고 약 한 달 간격으로 <벅스 라이프>가 개봉됩니다. <개미>는 서울관객 28만, <벅스 라이프>는 37만 관객을 모읍니다.
이 부분에 있어 최고로 뽑을 수 있는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내세웠던(정작 스티븐 스필버그는 감독이 아니라 프로듀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딥 임팩트>와 브루스 월리스를 내세운 <아마겟돈>이 아닌가 합니다. 5월 16일 가정의 달을 택한 <딥 임팩트> 그리고 7월 3일 여름시즌을 택한 <아마겟돈>. 채 두 달 차이도 안 난 상태에서 개봉이 되었는데, 결과는 <딥 입팩트> 서울 64만, <아마겟돈> 117만으로 <아마겟돈>이 흥행이 더 좋았습니다. 북미서도 5월 8일에 개봉된 <딥 임팩트>는 1억 4046만 달러, 당시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아마겟돈>은 7월 1일 개봉되어 2억 158만 달러를 벌어들입니다. <아마겟돈>을 배급한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보다 더한 흥행을 기대했었다고 하니 이 성적표는 그들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디즈니스튜디오 회장이었던 조 로스는 경쟁영화인 <딥 임팩트>가 흥행이 잘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래, 분명히 두 영화는 설정이 같다. 하지만 <딥 임팩트>는 <그날이 오면(On The Beach, 1959)>를 다시 만든 영화다. 그리고 <아마겟돈>은 우주판(版) <더티더즌(The Dirty Dozen, 1967)>이다. 둘 다 흥행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두 편이 서로의 흥행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할리우드의 영화전략’ 내용 중에서 발취하였음. 피터 바트 지음) 아마도 많이 초조해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이런 말은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날이 오면>보다 <더티더즌>이 흥행이 더 잘된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만약 이 두 영화를 보고 여러분은 그 장면이 <아마겟돈>의 것인지, <딥 임팩트>의 것인지 구별할 자신이 있으신지요? 이렇게 비슷한 영화들이 같이 개봉되면 당연히 상대에게는 피해이며 자신도 손해일 것입니다. 피해야 한다면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도 저도 어쩔 수 없다면 뒤로 가는 것이 조금은 유리해 보입니다.
글 |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 《영화 배급과 흥행》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