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젠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살아갈 날들의 어딘가에 잘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김병욱 감독 시트콤 중 파괴적인 결말로 가장 유명한 건 MBC <지붕 뚫고 하이킥!>(2009~2010)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충격이 컸던 작품은 SBS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였다. 그 시트콤의 결말은 참 기괴했다. 마지막회 직전까지 어떠한 비극의 조짐도 없었던 그 작품은, 마지막 회에서 갑자기 정수(박정수)를 암으로 죽여버리면서 그보다 더 우울할 수 없는 결말을 맺었다. 온 가족이 함께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던 장면은 정수의 장례식 영구버스 장면으로 이어졌고, 함께 웃고 떠들던 가족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흩어졌다. 고향으로, 해외로, 각자의 방으로. 무방비 상태로 마지막회를 보던 시청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이게 뭐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보았을 때, 마지막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정수가 간헐적으로 복통을 호소하는 동안에도 가족들은 일상을 살았다. 이름 난 식당에 가서 고기를 사와서 나눠 먹고, 주현(노주현)의 계장 진급을 축하했다. 정수는 딸 윤영(최윤영)과 함께 새 옷을 사고, 고향 후배이자 동서인 종옥(배종옥)과 함께 차를 마셨다. 영삼(윤영삼)은 자신의 애인을 빼앗아 간 복건(성기섭)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면 좋을지를 두고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펼쳤다. 아무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한 채 평범하게 일상을 보냈는데, 그저 일상의 일부처럼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그게 당연해 보였다. 대부분의 비극은 예고 없이 무심하게 찾아온다는 걸 이젠 알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린 종종 마치 영원히 살 사람들처럼 굴곤 한다. 건강검진을 미루고, 가족여행을 미루고, 언제 한번 밥 한 끼 먹자는 약속을 미루고, 별 것도 아닌 일로 서먹서먹해진 사람과의 화해를 하염없이 미룬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지속되면,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면,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건강이나 무탈 같은 평범한 일상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게 아니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쇠퇴하고, 주변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나의 30대는 갑상선에 생긴 호두만한 사이즈의 종양을 제거하면서 시작했고, 아직 마흔이 안 된 친구들이 몸 속에서 예상치 못한 혹을 발견하며 병원 신세를 졌으며, 서른도 채 되지 않은 후배는 자다 말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우리 중 우리 생에 던져진 불행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다. 마치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속 정수가 그랬던 것처럼, 우린 그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뭐든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평범한 일상은 당연한 게 아니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는 거니까. 서로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꼭 죽음이나 질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 예기치 못한 변화와 이별들은 얼마나 많은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속 정수가 세상을 떠난 뒤 1년을 다룬 후일담에서, 주현은 병적인 게으름을 이겨내고 성실한 계장이 되었고, 영삼 또한 말썽을 멈추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성적은 형편없지만, 최소한 꾸준히 노력하는 학생은 되었다. 노주현-노영삼 부자가 제 삶에서 성실함을 찾아낸 건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일찌감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정수 또한 살아서 그들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면 아쉬울 일도 적었을 테지.
“우리 삶에 가장 빛나던 순간들은 언제일까? 엄마는 고등학교 학창시절이었다고 회고하셨고, 큰아빠는 큰엄마와 연애하시던 그 때, 그리고 아빠는 주저없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난,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살아왔던 시간 속에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의 수많은 열린 문 속 어딘가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그 때가 언제일까? 나는 기다린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민정(김민정)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민정은 북적이던 노씨네 일가 거실이 휑해진 우울한 1년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얼핏 들으면 막연한 미래를 꿈꾸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다시 곱씹어보면 민정의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민정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젠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살아갈 날들의 어딘가에 잘 숨겨져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민정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모든 열린 문들을 열심히 뒤지며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막연한 미래로 행복을 유예하는 게 아니라, 바로 오늘일지 모르는 그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태도로. 그래서 강산이 얼추 두 번은 바뀐 뒤, 나는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결말이 아주 비극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