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도르!” 광고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을 볼 때마다 그녀의 등 뒤로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환상을 본다. 신화 속 여신이 현실로 걸어 들어온다면 샤를리즈 테론 같지 않을까란 착각과 함께. 그렇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교를 거부하는 특정한 것이라기보다, 신화나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고전적이고도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닮았다.
이런 이미지가 배우 활동에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데뷔 초의 샤를리즈 테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곤 했다. 내가 테론과 가장 혼동했던 건 애슐리 쥬드였다. 샤를리즈 테론이 마릴린 먼로 닮은꼴로 불렸다면, 애슐리 쥬드는 <노마 진 앤 마릴린>에서 마릴린 먼로로 분하기도 했으니, 두 신인 여배우의 행보를 비교하는 건 호사가들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하여튼, 샤를리즈 테론의 고전적이고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그녀의 활동 폭을 적잖이 제한시켰다. 굳이 샤를리즈 테론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전형적인 금발미녀’, 남자 주인공의 옆에서 조명을 밝히는 캐릭터로 줄곧 쓰인 것이다.
키아누 리브스와 호흡을 맞춘 <데블스 에드버킷>(1997)은 무색무취 섹시 심벌로 소비되던 샤를리즈 테론을 비로소 마주 보게 한 작품이다. 현대판 악마로 분한 알 파치노의 ‘격정’과 출세에 눈먼 키아누 리브스의 ‘욕망’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샤를리즈 테론은 히스테릭한 개성을 캐릭터에 부여하며 ‘마론 인형’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이탈리안 잡>(2003)에서 대역 없이 고난도 카체이스 액션을 소화하며 강인한 면모를 선보인 테론은(그러고 보니 퓨리오사의 될성부른 떡잎은 이때부터), <몬스터>(2003)를 통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전환점을 맞는다.
거대한 떡대와 출렁거리는 뱃살, 누런 치아에 듬성듬성한 눈썹을 드러내며 <몬스터>의 연쇄 살인마 에일린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막대기로 머리를 타격당한 듯한 충격을 받아 속으로 외쳤더랬다. ‘헐~!’ 몸무게를 14kg을 불렀거나, 보철로 구강 구조를 비틀었다는 외형적인 변화도 놀랍긴 했으나, 인생의 막다른 코너에 몰린 에일린이 흘리는 심리적 파열음이 어찌나 구구절절한지 보는 동안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기도 했다. 8살 때 아버지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아 거리의 창녀로 삶을 연명했던 여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만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기구한 운명의 여성을 소름 돋을 만큼 놀랍게 스크린으로 소환시킨 것이다. 이 작품으로 테론은 그해 베를린 영화제,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등 19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는 아프리카 출신 최초의 주연상 수상. 이후 한동안 남아공(테론의 고향)에서 태어난 소녀들의 이름 1/3이 ‘샤를리즈’로 명명된 사건의 출발이기도 했다.
<몬스터> 이후에도 나는 테론을 다른 사람으로 종종 착각하곤 했다. 데뷔 초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 배우의 변신술이 손오공 둔갑술 수준이라 뒤늦게 ‘저 사람이 샤를리즈 테론이라고?’ 하고 순간을 여러 번 맞봤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에서도 영화 시작 10분 정도 지나서야 스크린을 활보하는 저 여성이 테론임을 알아챘으니, 또 한 방 먹었다. 할리우드의 분장술도 분장술이지만, 이 영화에서 테론은 목소리마저 연기하며 자신을 감쪽같이 지워낸다.
테론은 <몬스터>에서부터 제작사를 차려 영화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어쩌면 자신의 외모가 영화에서 허무하게 사용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또 하나. 테론은 세상이 <베가 번스의 전설>(2000)이나 <스위트 노멤버>(2001)처럼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 터득했다. 테론의 어머니가 알코올 중독인 남편을 정당방위로 살해한 아픈 가족사 말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15살의 테론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의 풍파에 맞섰을지 그 마음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테론은 2019년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업계에 막 발을 들여놓았던 1994년 한 유명 감독으로부터 오디션을 빌미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커리어를 빌미로 한 능욕 앞에서 신인 배우 테론의 마음을 또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 것인가. 가부장제와 여성차별에 저항하는 캐릭터에 뛰어드는 테론의 행보는 아마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 테론이 출연뿐 아니라 제작에 참여한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폭스뉴스 앵커들이 미디어의 제왕 로저 에일스 회장을 성희롱 혐의로 고발해 물러나게 한 역사적인 소송을 그린다. 2005년 출연한 <노스 컨츄리>는 미국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소송에서 승소한 조시 에임스의 법정 투쟁을 극화한 작품이었다. 테론 최고의 영화를 두고 <몬스터>와 자웅을 겨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그녀가 분한 퓨리오사의 결단은 어떠한가. 아기를 낳은 씨받이로 전락한 여성들을 이끌고 폭군 임모탄이 지배하는 도시 시타델로부터 탈출한 퓨리오사는 영화 말미 핸들을 돌려 시타델을 접수하기 위해 역주행한다. 도망가는 대신, 정면으로 부딪쳐 가부장제의 신화를 깨뜨리기. 현실에서 테론이 보여 온 행보 또한 그러하다. 손오공 부럽지 않은 둔갑술을 무기로.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