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1일, <올드보이>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바람난 가족>, <4인용 식탁>, <장화, 홍련>,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실미도> 등의 영화가 몽땅 쏟아졌던, 지금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해라고 일컫는 2003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10년 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재개봉했고, 개봉 이후 무려 13년이 지난 2016년, 새로운 촬영 현장 영상 등을 토대로 만든 메이킹 다큐멘터리 <올드데이즈>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지난 십여 년간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도 또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을까.

영화 <올드보이>에 관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를 접하게 될 새로운 관객에게는 과거의 전설처럼 회자될 <올드보이>의 새로운 제작 비하인드를 소개한다.


※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혁명적인 영화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올드보이>는 미네기시 노부아키, 츠치야 가롱의 일본 만화 '올드보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만화를 재밌게 본 임승용 프로듀서가 박찬욱 감독에게 추천하면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훗날, 임승용 프로듀서는 <아가씨>의 원작 '핑거스미스'도 박찬욱 감독에게 추천하게 된다.)

지금도 파격적이어서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근친상간 등의 소재를 담고 있는 영화였지만 "당시 좋은 한국영화라는 평가를 받던 영화들이 갖고 있던 리얼리즘 계열과는 달리" 하나의 완전하면서도 극단적인 허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박찬욱 감독의 발상에서 전체 기획이 출발됐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무엇보다도 원작과 모든 면에서 다른 방향으로 영화가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란 말이야"라는 대사처럼 원작 자체를 다르게 보기 시작하면서 다른 전개, 다른 결말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원작에는 전혀 없는 '근친상간' 모티프가 덧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던 남자 오대수(최민식)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의 시작과 끝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메이킹 다큐멘터리 <올드데이즈>(연출 한선희, 제작 백준오)는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갖고 있던 수많은 문화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영화는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상영 기회를 통해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관객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영화 자체에 관한 해석과 비평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스탭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현장을 추억하는 영화로서 의미가 깊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토록 무모해 보였던 도전을 아름답게 성공시켰을까?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되어준다.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출연배우들을 실제 영화 촬영 장소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듣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 다큐멘터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배우 오광록의 몫이어야 했다. 실제로 영화를 여는 역할이기도 했으니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때 그 아파트 옥상을 찾은 오광록은 감격스러워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오광록과 유연석이 각각 연기한 장면의 구도가 닮아 보이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의 시작 때문인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인물들이 특이하다는 게 새삼 발견된다. 영화의 시작을 장식하는 '자살남' 캐릭터로 특별출연한 오광록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라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 모두 등장한 유일한 배우가 됐다.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단역 노동자 역할을 생각하면 영화의 시작과 끝을 각각 알렸던 역할이라서 좀 독특한 우연이다.

유연석은 당시 이우진(유지태)의 젊은 시절 역으로 등장했는데 그때 이름은 본명인 안연석이었다. 그는 대학교에 들어가 연기학원을 다닐 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올드보이> 의상팀으로 들어가면서 오디션을 권했던 게 출연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그가 경상도 사투리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현장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아무튼 <올드보이>는 유연석에게 처음 영화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알려준 영화였다. 그는 동년배 배우들과 달리 필름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한다. (그의 인터뷰는 블루레이 부가영상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배우 윤진서와 유연석

이우진의 누나 수아 역을 연기했던 윤진서 역시 <올드보이>로 데뷔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과학실 장면이 배우로서 첫 영화의 첫 촬영 장면이었다고. 당시 박찬욱 감독은 두 배우를 아침부터 과학실에 방치시킨(?) 다음 "잘 의논해보라"면서 어떻게 찍을지 연습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루종일 과학실에서 이 어려운 장면에 대해 고민했고, 촬영은 결국 새벽에야 이뤄졌다고 전한다.

배우 강혜정의 '사시미 투혼 오디션' 에피소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윤진서 역시도 당시 독특한 오디션을 경험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제작자 연출부 감독에 둘러싸여 '밥을 먹는데 뚜껑을 여니 개구리가 들어있으면 어떻게 반응하겠느냐'를 주제로 즉흥 상황극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배우 최민식이 상대 역을 해주었다고.  


젊은 패기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당시 <올드보이>의 제작진은 현재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중역으로 성장했다. 이제 막 40대가 된 박찬욱 감독은 촬영, 의상, 분장,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이 많지 않은 젊은 인력 중심으로 팀을 꾸렸다. 그리고 그들이 현장에서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영화 속 수많은 디테일은 모두 이런 젊은 스탭들의 머리에서 쏟아져나온 것들이다.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정정훈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김상범 편집감독 모두 박찬욱 감독의 훌륭한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영화의 상세한 요소들이 모두 감독의 머리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사소한 움직임과 구도, 배우의 의상, 벽지의 문양, 영화 장면 편집 순서 등 다양한 부분에서 각 스탭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전체 영화가 완성됐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이우진 역의 유지태가 평소 넥타이를 잘 매고 다니지 않아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제로 배우가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시키기도 했다. 극중 오대수의 헤어스타일도 송종희 감독의 아이디어. 배우가 어색해하는데도 박찬욱 감독까지 설득해가면서 밀어붙인 아이디어였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제안한 벽지 디자인은 봉준호 감독도 너무 과하다며 말렸을 정도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수영화 중
하나가 <올드보이>다. - 제임스 완 감독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실제 삶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이야기하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이미 각본 단계에서 모두 정해진다. 물론 현장에서 배우들과 스탭들과 의논해가면서 만드는 부분도 상당수 있다.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한국영화사의 명장면에 길이남을 장도리 장면 역시 모든 배우, 제작진의 열정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엑스트라에 투입됐던 액션 대역 배우 중 여러 명의 배우들이 무술감독으로 성장해서 활동 중이다. 심지어 이 장면은 할리우드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촬영에 쓰인 장도리는 당연하게도 플라스틱 모형이었지만 맞으면 충격이 있었기에 촬영하는 데 고생하는 장면이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블루레이에 수록된 메이킹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이 DVD로 빌려본 아시아 영화
수많은 남성 관객들이 따라해 보려다가 좌절했던 바로 그 요가 장면.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오대수와 이우진이 격돌하는 펜트하우스 장면에서는 제작진 모두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컷 사인을 하는 감독, 카메라와 조명 장비를 관리하는 스탭들, 심지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조차도 꾸벅꾸벅 졸면서 촬영했을 정도로 고생했다. 당시 현장 취재를 나왔던 기자들 대부분이 바닥에 만들어놓은 수로에 빠지기도 했다.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PLAIN ARCHIVE

<올드보이>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놀라운 에너지로 가득한 영화다. 그리고 메이킹 다큐멘터리 <올드데이즈>는 그러한 영화적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배우 윤진서는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장 스탭 모두가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누구든 현장에서 하루종일 영화 이야기만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모든 현장이 이럴 것 같았는데 이후 다시는 <올드보이> 같은 현장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당시 현장의 분위기야말로 지금도 여전히 <올드보이>를 기리는 이유일 것이다.

* 영화에 관해 더 관심 있는 관객들은 <올드보이> 블루레이에 수록된 다큐멘터리 <올드데이즈>와 다양한 부가영상에서 상세한 영화 제작 뒷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