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보다 약자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것으로 제 사회적 위치를 확인 받고 싶어하고 그게 행복이라 믿으려 애쓴다.
“서울의 노른자 땅, 강남의 랜드마크, 집값 올리는 것도 전국민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눈에 띄게 비싼 아파트” MBC <미쓰리는 알고 있다> 속 ‘궁 아파트’의 실제 모델이 어디인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지어진 지 40년이 지나 곳곳에 금이 가거나 녹이 슬어서 실거주용으로는 불편함이 크지만, 일단 재건축이 진행되면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좀처럼 집값이 떨어질 줄 모르는 아파트. 그러나 수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초고층으로 재건축을 진행하려다 반복해서 퇴짜를 맞은 바람에 조합 설립 17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재건축 허가를 받지 못한 아파트… 아무리 드라마가 ‘궁 아파트’라고 말해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OO아파트’라고 자동번역되는 걸 막을 길이 없다.
현실 속 OO아파트 주민들은 어떨지 몰라도, 드라마 속 궁 아파트 주민들은 대체로 어디 한 구석쯤 고장 난 채로 산다. 주민들은 아침마다 경비원에게 차를 금방 뺄 수 있게 주차 정리를 해 놓으라고 윽박지르고, 궁 부동산 미쓰리 궁복씨(강성연)에게 온갖 잡다한 허드렛일을 부탁한다. 재건축 조합장 봉만래씨(문창길)는 알량하게 쥔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보다 어린 모든 사람들에게 막말을 내뱉고 택배기사에겐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 다닐 것을 요구한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수진씨(박신아)가 화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부녀회장(전수경)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람 죽은 아파트라고 소문 나서 집 값 떨어지고 재건축에 지장 생기면 어쩌나”다. 궁 아파트 주민들은 대체로 사납고, 너무 쉽게 괴물이 된다.
어쩌면 재건축이 잘못될까 하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생의 모든 목표가 오로지 교육을 통한 계급의 되물림과 재건축을 통한 부의 증식에 쏠려있다 보면, 사람들의 신경줄이 팽팽해지고 성정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계급과 막대한 부를 확보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걸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행복을 실감할 틈이 없으니, 자꾸 남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제 불행을 감추고 행복을 가장하려 든다. 자기보다 약자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것으로 제 사회적 위치를 확인 받고 싶어하고 그게 행복이라 믿으려 애쓴다.
그렇게 겉으로는 한사코 괜찮은 척 구는 궁 아파트 주민들은, 속으론 자기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제 불행을 숨기느라 주변 사람들에게 개차반처럼 굴었던 조합장도, 재건축 허가가 안 떨어지는 게 재산권 침해가 아니라 생존권 침해라며 분개하는 부녀회장도, 끊임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울상인 병운건설 사위 이명원씨(이기혁)도, 사람 죽어가는 앞에서도 자신의 불행을 먼저 재는 병운건설 딸 한유라씨(김규선)도, 사춘기 질풍노도의 내면세계를 사람 패는 거로 분출 중인 열아홉 서태화군(김도완)도 모두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안쓰럽고 애틋하다 여기는 사람들이다. 딱하고 씁쓸하긴 한데, 또 크게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아니, 누가 그렇게 아등바등 제 욕망만 채우는 괴물이 되라고 등 떠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제 OO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알고 지낸 적이 있다. 강남의 이 곳 저 곳을 이사 다니다가 마침내 가장 상징적인 OO아파트에 입성하는데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안 그래도 은은하게 사람을 무시하던 그는 OO아파트에 입성한 직후 노골적으로 사람을 내리 깔아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니? 너도 이제 슬슬 계획을 세워야지. 아, 너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니까 네가 좋아하는 걸 하고 살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부탁한 적도 없는 걱정을 다 해주고, 갑작스레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라는 조언을 쏟아내고, 마치 뭍에 서서 물에 빠진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범사를 안쓰러워 하는 그의 시선이 역해서 한동안 그와 연락을 끊었더랬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는 나를 질투했다고 한다. 부의 축적단계로 보나, 학벌로 보나, 가정의 화목도로 보나. 어딜 봐도 내가 더 불행해야 맞는 거 같은데,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는 내가 신기했단다.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열정을 쏟을 만한 이슈를 찾아 눈을 반짝거리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게 이 악물고 내 불행을 찾아내려고 날 들쑤신 거였다. 그래봐야 쟤가 나보다 더 불행할 거라는 믿음으로. 내막을 알고 나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모든 진실이 드러난 뒤 허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궁복씨처럼, 나는 입 안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던 것이다. 아등바등 부와 명예를 끌어모은 결과가 고작 저거야…?
행복을 가장하기 위해 불행한 진실을 숨기고, 뒤틀린 욕망을 채 놓지 못한 탓에 파멸로 달려가는 궁 아파트 주민들을 다룬 <미쓰리는 알고 있다>를 보며 가장 징그럽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드라마 본편이 아닌 중간광고였다. 1부와 2부 사이의 중간광고 중 하나는, 한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 CF였다. 드라마는 그렇게 욕망을 향해 달려봐야 또 때 되면 때려부수고 새로 짓자고 할, “그래 봤자 돌덩이 먼지덩이”일 뿐이라는 궁복씨의 말로 마무리되는데,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파트 CF가 붙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징글징글했다. 난 분명 TV를 껐는데, 어쩐지 아직도 궁 아파트 단지 안인 것만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