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봄,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문을 연 데이비드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의 <트윈 픽스>는 시청자들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드라마였다. 살인 미스터리는 저마다의 비밀을 숨긴 의뭉스러운 마을 사람들과 어딘가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이 드리워진 숲에 둘러싸여 구불구불 흘러가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선과 악,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뒤죽박죽 엉켜 모호해진다. 낯설고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한 <트윈 픽스>는 열렬한 반응을 얻으며 ‘바보상자’라 불렸던 TV 지형에 변화를 불러왔다. 이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꾸준히 나왔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최근 왓챠에 시즌 2로부터 25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 2017년작 시즌 3이 올라왔는데, 이전 두 시즌도 올라오길 바라며)
리버데일(Riverdale)
<트윅 픽스>와 <가십걸>이 만났다? 제작진이 <트윈 픽스>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아치 코믹스 원작 드라마 <리버 데일>은 경치가 아름다운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위선적인 사람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과 탐욕이 얽힌 살인 미스터리를 첫 시즌 내내 이어간다. 마을의 명문 블로섬 가문의 아들 제이슨이 실종된 후 호숫가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처음부터 사건에 관심을 가졌던 저그헤드와 베티를 중심으로 10대들이 주축이 되어 그들의 부모들이 연루되었을지도 모를 살인사건의 배후를 추적한다. <트윈 픽스>에서 폭력적인 남편 리오와 나쁜 남자 스타일의 10대 바비와 삼각관계에 휘말렸던 쉘리 역의 마드첸 아믹이 베티의 엄마 앨리스로 등장하고, FBI 요원 데일 쿠퍼(카일 맥라클란)와 성이 같다.
로스트(Lost)
J.J. 에이브럼스가 ‘미스터리 박스’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했을지 몰라도 그 개념은 <트윈 픽스>에서 먼저 시작됐다. 2004년 선보인 <로스트>는 처음에는 이름 모를 섬에 추락한 여객기 생존자들의 표류기를 그린 드라마 같았다. 하지만 <트윈 픽스>가 살인 미스터리로 시작해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진화했던 것처럼 <로스트>는 추락에 관한 수수께끼와 함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로운 전개 양상을 보였다. 또한 <트윈 픽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들처럼 비행기 생존자들은 비밀스러운 사연을 가졌고,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끝난다는 점도 닮았다. 다만 <로스트>는 그 정도가 너무 과해 점점 시청자들의 불만이 높아졌지만. <트윈 픽스>가 영화와 TV,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등의 신선한 시도로 변화를 불러왔다면, <로스트>는 본격적으로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미스터리(=떡밥)를 동력 삼아 시즌을 이끄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고 이후 비슷한 패턴의 작품이 쏟아졌다.
웨이워드 파인즈(Wayward Pines)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제작과 에피소드 연출에 참여한 <웨이워드 파인즈>는 <트윈 픽스>의 그늘에서 태어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3부작 소설을 원작으로, 연방 요원 실종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아이다호주의 웨이워드 파인즈란 마을을 찾은 비밀 요원 에단 버크가 기이한 현상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첫 회가 끝날 무렵,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 버크는 낯설고 기묘한 위화감이 가득한 마을에서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무르게 될 거란 사실을 알아차린다. 마치 쿠퍼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트윅 픽스에 머물렀던 것처럼. 게다가 그곳은 한 번 들어서면 빠져나가기 힘든, 살인자와 초자연적인 존재를 뛰어넘는 섬뜩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트루 디텍티브(True Detective)
지역적 특색을 살린 으스스한 분위기, 기괴한 살인사건, 그리고 집념의 FBI 요원. <트루 디텍티브>는 <트윈 픽스>의 심각하고 진지한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수사관으로서 실력은 평범하지만 사교성이 좋은 마틴, 반대로 성격 빼고 수사관으로서 모든 게 완벽한 러스틴, 두 형사가 파트너가 되어 루이지애나주의 사탕수수밭에서 해괴한 모습으로 발견된 여성 살인사건을 수사한다.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 옐로우 킹은 음울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드리우며 오랫동안 릴랜드 파머를 조종하며 파국을 불러왔던 악의 정체를 연상시키고, 늘상 담배를 입에 물고 철학적인 말을 던지곤 하는 러스틴은 염세적이고 비사교적이긴 해도 친절하고 커피와 도넛을 좋아하는 쿠퍼의 향기가 배어있다.
더 킬링(The Killing)
‘누가 로지 라슨을 죽였는가’라는 미스터리의 포문을 연 <더 킬링>은 자연스럽게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란 의문을 던진 <트윈 픽스>를 떠올린다. 북유럽 특유의 침울하고 낮게 가라앉은 정서를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잿빛 하늘의 시애틀로 옮겨와(덴마크 드라마 리메이크작) 사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두 형사, 사라 린든과 스티븐 홀더가 10대 로지 라슨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하루 단위로 펼쳐 보인다. <트윈 픽스>처럼 범인의 정체를 꽁꽁 숨기고 두 시즌을 이어가는 동안 살인사건이 가족을 비롯해 주변에 미친 우울한 그림자를 드러내며, 추악한 욕망이 얽힌 사건의 진실로 향해간다. <트윈 픽스>와 뚜렷하게 다른 게 있다면 의심하고 마찰을 빚으면서도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두 형사일 것이다.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기묘한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 작품을 꼽으라면 <구니스>, <스탠 바이 미>, <E.T> 등의 1980년대 영화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고 평온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실종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트윈 픽스>와 유사한 지점을 갖는데, 본격적으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가동하기 전을 보자.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윌은 어두운 숲을 지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윌의 엄마 조이스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보안관 호퍼는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 실종사건이 아님을 깨닫는다.
엑스-파일(The X-Files)
<엑스-파일>은 FBI 요원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풀어간다는 점에서 <트윈 픽스>를 연상시킨다. 특히 불가사의한 현상을 쫓는 멀더 요원이 <트윈 픽스>에서 DEA(마약단속국) 요원으로 몇 차례 등장했던 데이비드 듀코브니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가 맡은 멀더 요원은 파트너인 냉철한 이성주의자 스컬리와 달리 초자연적인 현상에 무척 집착하는 인물로 마치 <트윈 픽스>의 정서를 물려받은 것 같다. 사악한 영혼 밥보다 우주에서 온 외계인에 더 관심을 가진 것 같지만. <트윈 픽스>는 지난 2017년에 25년 만의 이야기로 돌아왔는데, <엑스-파일>은 한 해 먼저인 2016년에 14년 만의 새 시즌을 선보였다.
에그테일 에디터 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