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라는 수식어는 받지 않는 게 차라리 이득이다. 영화 분야에서 이력을 막 시작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천재 칭호가 붙는 순간 세상은 그를 주목하지만 동시에 그를 끌어내리려는 모종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높아진 기대치는 부담으로 그를 포박할 것이고, 늘어난 관심만큼 불신도 힘을 키울 것이다. 인상적인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 공격받기 쉬운 게 또 천재다.
우린 그런 천재(라 불렸던 이)들을 몇 알고 있다. <식스 센스>로 데뷔와 동시에 천재 감독 레벨을 부여받은 M. 나이트 샤말란에게 <식스 센스>는 평생을 싸워야 하는 일종의 업보로 작용했다.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이자 천재로 불렸던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나. 그에 비하면 26살이라는 나이에 만든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을 받은 후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다”라고 외친 스티븐 소더버그는 일찍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자였다. (이후 그는 침체기를 겪기는 했으나, 저예산 독립영화와 할리우드 주류영화 사이를 곡예 넘듯 안정적으로 오갔다.)
자비에 돌란은 이런 천재들의 놀이터에 등장한 돌연변이다. 그에겐 천재 연출가 외에도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칸의 총아, 힙스터, 패션 아이콘, 꽃미남 배우, 마성의 게이, 글로벌 인플루언서… 그러니까 미모와 재능과 센스를 한 손에 쥔 사기 캐릭터인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수식어들이 충돌을 일으키며 그에 대한 ‘성찬과 비판’의 이유로 끊임없는 반복 재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비에 돌란은 캐나다의 유일한 프랑스어 사용권인 퀘벡주에서 자랐다. 완전한 캐나다도 완전한 프랑스도 아닌, 다양한 문화가 혼재한 곳. 그의 DNA에는 또 이집트와 아일랜드의 피가 흐른다. 캐나다인으로 사는 이집트인-아일랜드인 혼혈아. 다문화적인 환경은 돌란에게 크고 넓은 세상을 모의체험할 수 있게 했고, 그가 세상의 무수한 편견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롭게 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이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것도, 성소수자로서의 존재론적 질문을 지속적으로 타진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할 것이다.
돌란의 출발은 연기였다. TV 쇼 프로덕션 매니저인 이모의 제안으로 4살 때 연기를 시작했다. 이모 덕에 배역을 맡았으나 그것이 프리패스가 되지는 못했다. 10대에 들어서면서 오디션에서 연신 미끄러졌다. 작은 키가 문제였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던 이 야심 많은 소년은 기회가 줄어들자 직접 카메라를 들어버렸다. 연기는 물론이고, 각본, 의상, 프로듀싱도 자급자족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칸 국제영화제의 부름을 받았고 감독주관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화려한 조명이 돌란을 감쌌을 때, 그의 나이 열아홉.
<아이 킬드 마이 마더>의 떠들썩한 데뷔는 돌란의 작업에 날개를 달았다. 내놓는 작품(<하트비트> <로렌스 애니웨이>)마다 칸에 초청되더니, 1:1 화면이라는 파격적 형식으로 촬영한 <마미>로는 누벨바그 거장 장 뤽 고다르와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공동수상까지 했다. 84세의 거장과 25세 청년을 시상대에 나란히 세운 칸의 선택은 (여러모로) 상징적이었고, (이슈몰이 면에서) 시의적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돌란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회의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가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너무 과시적이고 유치하다는 이유였다. 쉽게 말해 겉멋만 잔뜩 부릴 뿐, 속은 텅 비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허세, 자아도취, 나르시스트라는 단어도 돌란을 따르기 시작했다. 2016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단지 세상의 끝>은 그러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사람들은 칸이 돌란을 싸고돈다고 쓴소리를 냈다.
일단 칸이 돌란을 편애한다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는 돌란을 향해서만이 아니다. 칸은 원래 좀 그렇다. 한번 인연을 맺은 감독에 후한 면이 있으며, 그로 인해 특정 감독들을 편애한다는 시선을 늘 받아왔다. 돌란처럼 자신들이 발굴했다 믿는 신인이라면? 애정도는 강해진다. 실제로 칸영화제에 감독주간으로 입성한 후, 주목할만한 시선-경쟁부문-심사위원으로 이어지는 돌란의 행보는 흡사 칸의 ‘정예 코스’를 밟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화제 기간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던 <단지 세상의 끝>이 심사위원상을 받자, 현장에서 야유가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온 이유다.
그렇다면 그는 과대평가됐는가. 그렇지 않다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솔직히 <단지 세상의 끝> 대해서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심드렁한 느낌을 받은 게 사실이다. ‘칸 심사위원대상’이라는 이력은 다음을 위해 남겨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마타아스와 막심>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금 느낀 것. 인물이 처한 ‘어떤 상태’를 이토록 애틋하고도 조마조마하게 시청각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돌란이 천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는 특정한 심정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을 섬세하게 폭발시킬 줄 아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또 하나 확인한 건, 배우로서 돌란이 지닌 매력이다. 연기를 하고 싶어 연출을 시작했던, 돌란의 출발 말이다. 연기자 돌란의 이력은 ‘그가 연출하는 영화’와 ‘연출하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고 해도 무방하다. 매력도 차이가 크기 때문인데, 재미있게도 ‘배우 자비에 돌란’의 쓰임을 가장 잘 아는 건 ‘감독 자비에 돌란’이다. 돌란이 연출과 출연을 겸한 <아이 킬드 마이 마더> <하트비트> <탐엣더팜> <마티아스와 막심>을 살펴보라. 그의 이미지가 하나의 미장센으로서 기능한다는 인상을 받는 건 필자 만이 아닐 것이다.
반면 단역으로 출연해서 짧게 사라진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도 그렇고 주연을 맡은 <엘리펀트 송> 등에서의 돌란은 단신인 키가 부각돼 있고, 카메라 각도에 따라 그 특유의 섬세한 느낌도 자아내지 못한다. 그게 연출 탓인지 캐릭터 탓인지 혹은 돌란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배우 돌란’이 취약점인 건 확실해 보인다. 그의 약점은 자신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하는 감독 앞에서 그 매력을 십분 발사하지 못한다는 점인데, 이를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건 돌란 자신일 테니, 그는 메가폰을 쉽게 놓지 못하지 않을까. (고약한 말일지 모르지만, 돌란이 연출하는 영화 안에서의 돌란을 환영하다.)
예민한 감수성과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재능, 적재적소에 음악을 배치해 낼 줄 아는 센스는 돌란이 가지고 태어난 자산이다. 반면 그를 반격하는 깊이에 대한 아쉬움과 묵직함의 결여는 시간과 함께 무르익을 수 있는 부분이다. 자비에 돌란의 첫 글자인 엑스(X)는 ‘미지의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보여준 것 보다 보여줄 게 더 많은, 30대. 아직 완성되지 않는 미지수에 놓여 있기에 이 감독 겸 배우는 더 궁금해진다. 미리 답을 정하지 말고, 지켜보면 어떨까 싶다. 엑스의 방향을.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