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란 파커 감독이 오랜 지병으로 투병하다 지난 7월 31일 타계했다. 향년 76세. 조금은 이른 이별이라 할 수 있지만, 2003년 이후로 연출 일선에서 물러나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 에이드리안 라인, 휴 허드슨 등과 함께 60년대 후반부터 영국 광고계를 대표하던 연출자로 활약했으며, 역시 같은 필드에 몸담았던 제작자 데이빗 퍼트남과 만나 1971년 <작은 사랑의 멜로디>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영국 광고계 출신 감독들 중 제일 먼저 칸 영화제와 할리우드에 입성해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거머쥔 감독이 되었으며, 그 공헌을 인정받아 1999년 대영제국훈장 3등급(CBE)과 2002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벅시 말론>

<커미트먼트>

갱스터 장르를 어린이 시선으로 풀어낸 독창적이고 기발한 <벅시 말론>으로 데뷔하며 칸에 입성한 그를 할리우드에서 눈여겨본 건 당연지사. 이후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와 <페임>의 연이은 성공으로 독자적인 색채의 영화들을 연출했다. 동명의 앨범을 바탕으로 완성된 록오페라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과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PTSD를 다룬 <버디>, 악마주의 네오 느와르 <엔젤 하트>, 인종차별 문제의 <미시시피 버닝>, 음악영화의 진수 <커미트먼트>, 웰빙을 풍자적으로 다룬 <로드 투 웰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두 번째 뮤지컬 영화화인 <에비타>, 프랭크 맥코트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안젤라스 애쉬스>, 사형 문제를 다룬 <데이비드 게일>까지 과작이면서도 다양한 장르들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로 완성해낸, 진정한 의미의 작가였다.

무엇보다 알란 파커의 영화들에서 진중한 주제와 감각적인 스타일과 맞물려 빛을 발하는 음악의 탁월한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영상의 언어로 현실의 이면을 과장되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던 그에게 음악은 마법 지팡이와도 같았다. 그를 추모하며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을 안겨준 그의 영화들과 그 사운드트랙들을 돌아본다.


벅시 말론

음악: 폴 윌리엄스

고전 갱스터와 뮤지컬 그리고 아동영화가 기묘하게 뒤섞인 이 풍자적이고 정신 나간 멜로드라마를 위해 알란 파커가 떠올린 뮤지션은 바로 지극히 상업적이고 서정적인 폴 윌리엄스였다. 국내에선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70년대 미국의 포크와 팝, 소프트 락 씬에서 가시적인 성과물들을 쏟아내던 그는 파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뮤지션이자, 모던하고 인상적인 소리들을 만들어줄 것 같다는 감독의 비장의 승부수였다. 배우로도 활동하며 브라이언 드 팔머의 뮤지컬 <천국의 유령>으로 오스카 음악상에 오른 바 있는 폴 윌리엄스는 그 기대감을 배신하지 않고 흥미롭고 말랑말랑한 노래들로 경쾌하고, 위트 넘치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벅시 말론>

물론 아이가 어른 행세를 하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진짜 어른’의 소리가 담긴 부분이 파커는 조금 걸리기도 했지만, 바쁜 제작 일정상 이를 수정할 시간이 부족했고, 또 폴 윌리엄스의 음악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그대로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오스카 뮤지컬 부분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영화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과시했다(비록 음악상은 놓쳤지만 같은 해 <스타탄생>의 ‘Evergreen’으로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이질적이고 장난처럼 보일 수 있는 아이들의 연기에 그럴듯한 무게와 밸런스를 실어주는 폴 윌리엄스의 홍키통크 사운드는 금주령 시기라는 고전적인 색채와 의도된 상스런 천박함 그리고 아이들의 유치함까지 한 번에 다 잡아내며 난잡스런 소동극 같은 영화에 방점을 찍었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음악: 조르지오 모르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터키에 대한 왜곡된 시각과 사실과 다른 각색으로 지금은 논란의 여지를 남긴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조르지오 모르더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만큼은 단연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선택이자, 그 시대 트렌드를 반영한 결과였다. 쟁쟁하던 <슈퍼맨>의 존 윌리엄스와 <브라질에서 온 소년>의 제리 골드스미스, <천국의 나날>로 처음 오스카에 오른 엔니오 모리꼬네, 그리고 <천국의 사도>의 데이브 그루신을 제친 이변으로, 최초로 전자음악이 수상한 의미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뜻깊다. 애초에 파커는 반젤리스에게 음악을 맡기고 싶었지만, 예산이 부족했던 제작자가 대신 추천한 작곡가가 바로 조르지오 모르더였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70년대부터 일렉트릭 사운드에 빠져 뮤직랜드 스튜디오를 설립한 모르더는 당시 독일과 영국에서 자신의 앨범을 비롯해 도나 썸머 앨범을 제작하며 떠오르던 뮤지션이었는데 영화음악은 한 번도 작업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 얘길 나눈 파커와 모르더는 의기투합했고, 이국적인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마약 운반을 하다 검거된 미국인의 심정과 고난을 디스코 리듬에 전자악기로 풀어낸 전위적인 이질감은 영화에 신선한 활력과 긴장을 선사했다. 이후 모르더는 <플래시댄스>와 <탑건> 주제가로 오스카상을 2번 더 가져가며 80년대를 재패한 음악가가 되었고, 이후 반젤리스와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 등 일렉트릭 뮤지션들이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며 여전히 매력적인 장르임을 증명하고 있다.


페임

음악: 마이클 고어

뉴욕예술학교 학생들의 꿈과 열정을 담아낸 이 뮤지컬을 위해 알란 파커는 전작을 같이 한 조르지오 모르더를 음악으로 쓰고 싶었지만, 도나 썸머의 새 앨범 작업이 바빴던 탓에 같이 할 수 없었고, 대안으로 찾은 ELO(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실질적 리더인 제프 린에게 음악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그래서 낙점된 인물이 가수이자 배우인 레슬리 고어의 동생인 마이클 고어였다. 클래식 음악과 록음악을 병행하는 예일대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그 역시 이전까지 한 번도 영화음악을 맡아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파커는 복음성가와 락과 클래식 세 요소가 결합된 음악이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고, 고어는 작사가인 댄 피치포드와 팀을 이뤄 젊음의 불꽃이 튀는 곡들을 완성했다.

<페임>

애초에 음악 제안을 했던 조르지오 모르더의 느낌이 충만한 도나 썸머의 노래들이나 ELO가 부른 ‘Eldorado’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후시로 따로 녹음돼 더빙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파커의 의도에 따라 고어가 작곡한 곡들은 세트장에서 촬영되며 동시에 녹음되었다. 이렇게 담긴 생생한 노래들은 결국 오스카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동시에 휩쓸어가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알란 파커는 장편 데뷔작부터 세 번째 작품까지 만든 작품들이 모두 내리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올라 그중 두 번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며 음악적인 감각이 탁월한 감독으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페임>의 사운드트랙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며, 아이린 카라가 부른 동명의 주제가는 파커의 고향인 영국에선 1982년 가장 많이 팔린 싱글 2위에 오르기도 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음악: 로저 워터스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11번째 정규 앨범 ‘더 월’은 1979년 발매돼 빌보드 차트에서 15주간 1위를 차지하며 총 2400만장이 넘게 팔린, 괴력의 록 오페라다. 롤링 스톤즈가 선장한 500대 명반 가운데 87위를 차지하기도 한 이 앨범은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핑크 플로이드를 대표한다.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로저 워터스와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여긴 알란 파커가 만나 완성한 결과물로, 제작과정에서 여러 난항이 있었음에도 MTV스타일의 감각적인 영상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기호들, 제럴드 스카프의 초현실적인 애니메이션까지 맞물리며 알란 파커를 대표하는 음악영화이자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파격적인 실험영화로 남아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제목처럼 소통의 부재와 단절, 고립감을 표현하는 벽이 소리로나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파괴적인 전쟁과 파시즘의 광기, 획일적인 교육에 대한 불신 그리고 사회화 과정 속에 짓눌린 욕망과 무의식을 건드는 알란 파커의 환상적인 비주얼은 로저 워터스의 시니컬하고 멜랑꼴리한 사운드와 조화를 이루며 강렬한 충격파를 남긴다. 오리지널 앨범과 달리 영화화되며 수록곡들이 조금씩 변형되거나 반복적이란 이유에서 삭제됐다. 그래서 영화에선 ‘Hey You’와 ‘The Show Must Go On’ 두 곡을 들을 수 없다. 영화음악가 마이클 케이먼이 참여해 많은 도움을 줬는데, 이후는 그는 퀸이나 에릭 클랩톤, 메탈리카 등 팝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인상적인 작업물들을 남겼다. 사운드트랙으로 진행되던 부산물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12번째 정규앨범이자 로저 워터스의 마지막 참여작인 ‘Final Cut’으로 재구성되었다.


커미트먼트

음악: 윌슨 피켓

아일랜드 소울에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밴드를 결성해 성취를 이루고 해체하는, 일련의 흥망성쇠를 다룬 <커미트먼트>는 그간 알란 파커가 7∼80년대 보여준 영화들과 달리 인디영화의 결을 갖고 있지만, 음악 본령에 집중하는 탁월한 음악영화다. 끈적하면서도 흥에 취하는 이 사운드트랙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도 그럴게 이 영화를 준비하며 무려 수백 곡의 R&B를 선곡했고, 그중 선택지를 다시 75개로 줄인 후 최종적으로 24곡이 다시 선택돼, 실제 아마추어 뮤지션들이기도 한 출연자들에 의해 직접 공연됐기 때문이다. 앞선 영화 <페임>에서도 그랬지만, 현장감을 중시하는 알란 파커는 밴드의 리허설과 공연의 실체를 포착하고 싶었기 때문에 세트장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었다.

<커미트먼트>

알 그린과 아레사 프랭클린, 마빈 게이, 샘 쿡, 오티스 레딩 등 유명한 소울의 전설부터, 앤 피블스, 윌슨 피켓, 더 마블레츠, 클라렌스 카터, 리틀 밀턴 등 한번쯤 들어본 가수들과 맥 라이스, 제임스 카, 로이 헤드, 크리스 케너 등 국내엔 다소 생소한 아티스트들까지 다채롭게 짜여진 수록곡들의 면면은 짜릿하고 놀라운데, 흑인이 아닌 백인(그것도 유럽에 노동자 계층)이 소화하는 감성과 정서를 듣고 있자면 마치 켄 로치가 만든 음악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사운드트랙이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누렸으며, 무려 빌보드차트 200에 76주 동안이나 머무를 정도로 큰 반향을 이뤄냈다. 이후 2번째 앨범과 베스트 앨범까지 발매되며 그 인기를 이어갔다.


에비타

음악: 앤드류 로이드

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에바 페론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후 23년 만에 영화화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이다. 파커는 뮤지컬로 공개되기 전 76년에 발표된 컨셉 앨범을 듣고 영화화에 대해 제안했던 인연이 있다. 글렌 클로스와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이 에비타역으로 거론됐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건 영화화가 논의되던 80년대 중반부터 이 역할을 노렸던 팝스타 마돈나였다. 섹시 심볼이란 이력과 대사 없이 시종일관 노래로만 풀어가는 성스루(song-through) 뮤지컬이란 점에서 캐스팅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새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익숙하지 않은 84인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4개월간 레코딩 작업에 참여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그 우려를 날려버렸다.

<에비타> 촬영 현장

<딕 트레이시>에서 스티븐 손드하임이 만든 30년대 재즈 발라드풍 주제가 ‘Sooner or Later’를 부른 이후 가장 큰 도전이었던 마돈나의 변신은 성공적이었고, 일레인 페이지와 패티 루폰이 연기했던 오리지널 넘버와는 또 다른 마돈나식 해석과 팝적인 감흥을 전달한다. 파커는 웨버와 라이스가 신곡을 만들어주길 바라며 영화적 엔딩을 재구성했고, 그들은 뮤지컬 <크리켓> 이후 10년 만에 호흡을 맞추며 신곡 ‘You Must Love Me’를 작업해 오스카 주제가상을 거머쥐었다. 일반적으로 영화화되며 빠지는 곡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파커는 자신이 영감을 받은 컨셉 앨범을 바탕으로 각본을 새로 쓰면서도 원곡들을 모두 활용해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받았지만, 사운드트랙은 플래티넘 인증을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성공했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