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이 분한 인남은 납치된 소녀를 찾고 또 찾는다. 이정재가 연기한 레이는 그런 인남을 열추적 미사일 마냥 쫓고 또 쫓는다. 인남이 소녀에 대해 품는 집착에는 부성애와 자책감이 작용한다. 레이의 인남을 향한 관심의 출발선엔 복수심이 있다. 그런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인남의 동기에 반해 그런 인남을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레이의 동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져, 팽팽해야 할 추격의 균형추가 기운다. 심지어 영화는 레이의 입을 통해 이를 스스로 자백한다. “이젠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 영화에서 레이는 충분한 사연과 대사를 부여받지 못했다. 감독의 의도다. 홍원찬 감독은 악인 캐릭터에 구구절절 사연이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 어떤 의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악이 그 기원을 해명하지 않으려 할 때, 관객은 상상의 힘으로 악을 더 무서운 존재로 키우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런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미션이다. 플롯이 거세당한 인물을 받아든 이정재가 캐릭터 의상과 타투 등의 스타일링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살육에 앞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설정을 세심하게 구축하고 챙긴 건 관록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배우 스스로 캐릭터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다시 만난 ‘브라더’ 황정민 아닌가. <신세계> 정청-이자성의 브로맨스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팬들의 기대치 등은 결과적으로 이정재로 하여금 레이를 더 치열하게 살아내게끔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것이 방콕의 복도 신.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황정민과 대치하는 장면에서의 이정재는 흡사 굶주린 짐승과 같다. 며칠 굶은 이리가 눈앞에 먹잇감을 포착했는데, 아뿔싸, 장벽에 가로막혀 목표물이 ‘그림의 떡’이 되자 미쳐서 팔짝 뛰는 모습 같달까. 쇠창살을 뜯고 때리는 몸짓에선 으르렁으르렁 의성어가 진동하고, 인남을 노려보는 눈빛에선 이글이글 의태어가 춤을 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레이는 왜 그렇게까지 인남을 잡고 싶어 하는 가를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했을지언정, 그를 잡고 싶어 죽겠다는 마음만큼은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다. ‘왜’가 흐릿해진 레이의 추격이 ‘개연성 구멍’으로 지적됨에도 불구하고, 레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관객들에게 환심을 사는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연이 많아도 평면적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있는 반면 사연이 불분명해도 개성적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있는데, 레이는 후자다. 이를 가르는 건, 결국 배우의 존재감이다.
돌이켜보면 이정재는 인물의 심리를 비언어적으로 보여주는 데 일찍이 재능을 보여왔다. 사랑하는 여인을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내던 <모래시계>(1995)의 백재희. 이정재는 ‘여인을 애절하게 바라본다’ 같은 애매모호한 지문을 눈빛으로 감각해내며 전국 여성들의 잠들어 있는 연애세포를 깨웠던 이력의 소유자다. 물론 그때의 침묵과 지금의 침묵은 다르다. <모래시계>에서 재희의 대사량이 적었던 건 그의 연기력 부재 때문이기도 했는데, “대사를 줄이라는 명이 떨어져서 말 없는 신비한 캐릭터가 된 것도 있었다”(<힐링캠프> 中)고 이정재는 회상한 바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어색한 대사 처리로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이정재는 이제 없다. 그는 좀 더 깊어졌고, 더 많이 넓어졌으며, 긴장과 여유를 능란하게 조율해 낼 줄 안다.
이정재의 데뷔는 드라마적인 면이 있다.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연예계로 픽업됐고, 타고난 DNA로 초콜릿 CF에 발탁됐고, 배창호 감독으로부터 <젊은 남자>(1994)라는 생명수를 받은 후, <모래시계>로 인기의 왕관을 썼다. 이 모든 게 1년 사이에 벌어진 일.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대중의 기대를 꼬리 자르기 하는 전략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꾸준한 편차를 주려고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재희를 뒤로 하고 코믹한 속물 변호사(<박대박>(1997))로 얼굴을 바꾸더니, <정사>(1998)의 아련한 노스탤지어에 잠시 정차한 후 <태양은 없다>(1998)에 뛰어들어 흥신소 직원을 뻔뻔하게 소화했고, 도회적이고 트랜디한 이미지에 반하는 제주섬의 심부름꾼(<이재수의 난>(1999))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며 활동 반경을 꾸준히 넓혔다. 이 모든 건 배우를 옭아매는 이미지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찍이 간파한 자의 행보였다. 그러나 여러 의미 있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기로 환심을 사는 배우는 아니었다. 특히 <태풍>(2005), <1724 기방난동사건>(2008), 드라마 <트리플>(2009)의 연이은 실패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듯 보였다.
그런 이정재에게 <관상>과 <신세계>가 개봉한 2013년은 중요한 전환의 해였다. 두 영화가 단순히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두 작품에서 이정재는 전면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상대 배우들에게 많은 것을 내주고도, 존재감을 챙기며 극에 여운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도 이정재는 극이 진행되고 20여 분이 지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분량은 생각보다 적지만, 존재감은 기대 이상이다. 청춘스타 이미지가 강했던 이정재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담금질하며 배우의 이미지를 확고히 만들었다.
레이를 향한 부정적인 의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향한 비판 중엔 이정재의 레이 연기가 기존 <관상>의 수양대군이나 <암살>(2015) 염석진 때와 크게 다를 게 없어서 식상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이정재의 발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커 보인다. 영화 <관상>에서 이 배우는 기존과는 다른 발성, 그러니까 소리를 내부에서 걸걸하게 긁어서 내뱉는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고나왔는데, 그것이 캐릭터 카리스마에 일조하며 크게 호평받았다. 문제는 인상적이고 좋은 것은 그만큼 또 빨리 질리기 마련이라, 그러한 발성이 <암살> <신과함께>(2017) 그리고 레이로 이어지면서 기시감을 자아내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쪼’, 일명 ‘쿠세(나쁜 버릇’)로 보이지는 않을뿐더러 이 영화의 정서에 큰 흠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부정적인 의견에 수긍하는 한편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나왔다는 것은 배우 스스로가 짚고 돌봐야 할 지점이다.
이 배우는 멈출 줄 모르는 ‘모래시계’다. 배우로서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는 그는, 도전의 영역을 연출로까지 확장하려 준비 중이다. 가지 않고는 그 끝을 모르는 법이니까. 시도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4년간 직접 쓴 시나리오 <헌트(가제)>가 그의 감독 데뷔작. 오랜 영화적 동지인 정우성에게 러브콜까지 보냈다고 하는데, 이 만남 두 손 들어 환영이다.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