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이 많은 관객의 극찬을 받으며 상영중이다. 아버지랑만 사는 두 남매 옥주와 동주가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 사는 여름의 나날들을 그린 작품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작곡한 노래 '미련'이 총 3번이나 사용됐다. 비좁은 다마스에 몸을 싣고 살던 집을 떠나는 오프닝, 언제나 묵묵히 집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가 한밤중 거실에서 크게 노래를 틀어놓고 옥주도 멀리 떨어져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일 때, 그리고 영화 마지막. 노래는 같지만 임아영, 장현, 김추자가 부른 각각 다른 버전이 배치돼, 그 순간 저마다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과 더불어 신중현의 음악을 사용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미인”

<미인>

(1975)

196~70년대엔 특정 인물이나 작품이 인기를 끌면 그가 주인공을 맡는 기획영화가 제작되는 일이 흔했다. <미인>은 신중현과 엽전들의 노래 '미인'의 어마어마한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영화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타령 같은 쉬운 멜로디와 국악의 기운이 짙은 기타 리프가 단박에 귀를 사로잡는 노래는 1974년 당시 전국적인 유행가로 사랑받았다. 가난한 뮤지션 현(신중현)과 그의 밴드 동료 꽁치(이남이)와 엽전(권용남)이 미인(김미영)을 만나 숙식을 해결하는 등 도움을 받고 고정적인 일자리도 받으면서 상승가도를 달린다. 엽전들의 세 멤버 신중현, 이남이, 권용남이 모두 주연까지 맡았다. 인기를 노리며 제작된 영화라 만듦새가 좋진 못하지만, 영화 곳곳에 나오는 퍼포먼스 신은 신중현과 엽전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진귀한 사료가 됐다. 2년 전 블루레이로도 출시됐다.


“빗속의 여인”

<살인의 추억>

(2003)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에도 신중현의 곡이 사용됐다. 신중현이 1964년 밴드 에드 훠(Add 4)의 멤버로서 발표한 원곡을 장현이 리메이크한 노래 '빗속의 여인'은, 1980년대 중반 시대의 야만을 담아낸다는 <살인의 추억>의 방향에 걸맞은 시퀀스에 등장한다. 박두만(송강호)와 서태윤(김상경)이 술집에서 드잡이를 하며 싸우는 신 다음, 한밤이 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여자가 빨래를 널다가 비가 내리자 다시 거둬들인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풍경들과 장현의 '빗속의 여인'이 어우러진다. 화염병이 터지는 거리에선 경찰과 시위대가 거세게 대치하고, 조용구(김뢰하)는 어느 여자를 붙들고 무참히 구타한다. 이 신은 후반부 형사들이 검거의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병력이 모두 시위 현장에 있어 출동 지원되지 않는 상황의 복선이 된다. '빗속의 여인'은 한적한 골목에서 위장 수사를 하는 형사들의 차 안의 음악으로 이어진다.


“하류인생”

<하류인생>

(2004)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신중현이 <오늘밤은 참으세요>(1981) 이후 23년 만의 음악감독을 맡은 영화다. 사실 두 거장은 70년대 초중반 한 영화를 작업한 적이 있지만, 워낙 졸속으로 진행되던 영화 제작 환경(당시 임권택은 한 해에 6편씩 영화를 연출했다) 탓에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록 뮤지션인 김수철과 <서편제>, <태백산맥> 등을 작업하기도 했던 임권택은 "가장 많은 음악을 사용하는" <하류인생>의 음악은 신중현에게 청하며, <서편제>나 <춘향뎐> 같은 한국 전통음악 외에도 다른 음악이 있음을 해외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는 뜻을 품었다. 정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건달 태웅(조승우)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 곳곳에 중년 노장의 성숙한 록 사운드가 배어 있다.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노래 '하류인생'은 후반부 강렬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6분짜리 대곡이다.


“거짓말이야”

<밀양>

(2007)

<밀양>은 구원에 대한 지독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사 온 신애(전도연)는 유괴로 아들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학원 원장인 범인이 잡힌다. 고통 속에 살던 신애는 교회를 다니며 다시금 희망을 찾아 범인에게 면회까지 가지만, 신애 앞에 선 범인이 너무나 태연히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걸 보고 신앙은 산산조각난다.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는 신애가 음반가게에서 억지로 훔쳐 온 CD를 교회 설교장에서 몰래 트는 노래다. 연단에 선 자가 열변을 토하는 소리와 김추자의 노래가 뒤섞여 설교 따위 그저 거짓에 불과하다고 울부짖고 싶은 신애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신이다. 행사장을 빠져나오던 신애는 아주 잠시 하늘을 본다.


“님은 먼 곳에”

<님은 먼 곳에>

(2008)

<왕의 남자>(2005)로 큰 성공을 거둔 이준익 감독은 한물간 가수가 시골마을의 라디오 DJ 맡아 희망을 찾아가는 <라디오 스타>(2006)와 왕년에 음악을 함께 한 사내들이 중년이 되어 다시 밴드를 결성하는 <즐거운 인생>(2007) 등으로 음악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여성 캐릭터 순이(수애)를 내세운 <님은 먼곳에>(2008) 역시 음악, 특히 신중현이 만든 노래를 향한 애정이 뚜렷하다. 영화 제목만 하더라도 신중현이 쓰고 김추자가 노래한 '님은 먼곳에'에서 고스란히 따왔을 정도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위문공연단 보컬로 합류해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에 간 순이를 연기한 수애는 '님은 먼곳에'는 물론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간다고 하지 마오' 등 신중현이 작곡한 노래들을 직접 불렀다.


“햇님”

<더블: 달콤한 악몽>

(The Double, 2013)

미아 와시코브스카, 제시 아이젠버그 주연의 <더블: 달콤한 악몽>은 196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그룹 사운드 블루 코베츠의 음악을 적극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건 한국 음악이다. 바로 김정미의 '햇님'이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를 잇는 신중현 사단의 여성 보컬리스트 김정미의 1973년 앨범 <Now>는 신중현이 음악 전체를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커버 사진까지 직접 찍은 작품이다. '햇님'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금자탑이라 할 만한 앨범의 첫 문을 여는 곡이다. 단출한 기타 연주에서 시작해 김정미의 뇌쇄적인 노래가 더해지고, 서서히 고조되는 스트링이 뻗어 나가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을 안긴다. <더블: 달콤한 악몽>의 대미를 '햇님'이 장식하게 된 건, 2011년 미국의 레코드 제작사들이 신중현의 베스트 컴필레이션, 신중현과 엽전들의 데뷔 앨범, 김정미의 <Now>를 발매하는 등 영미권에 신중현의 음악이 더욱 폭넓게 알려진 분위기도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바람”

<마약왕>

(2018)

공교롭게도 이번 기획에서 소개하는 영화 중 송강호의 출연작이 3개나 된다. 송강호가 마약 밀매의 큰 손 이두삼을 연기한 <마약왕> 역시 신중현의 작품을 사용했다. 복잡한 심경을 담은 송강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끝나면 김정미의 노래 '바람'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지나간다. 상쾌한 분위기의 록 사운드에 관능으로 똘똘 뭉친 김정미의 목소리가 더해져 제목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감흥을 안긴다. '바람'은 신중현과 김정미가 의기투합해 1973년에 발표한 <바람>과 <Now> 두 앨범에 모두 수록됐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