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설득력 있게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일.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가기도 쉽지 않은데, 한 작품에서 1인 7역, 1인 13역, 1인 165역까지 소화해낸 배우도 있다.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 안에서 제 재량을 마음껏 뽐내며 보는 이의 재미를 몇 배 이상으로 끌어 올린 ‘1인 다역’ 경력자 배우들. 그들의 활약이 빛난 영화들을 소개한다.


: 앵커부터 걸인까지, 케이트 블란쳇의 1인 13역

매니페스토

감독 율리안 로제펠트 출연 케이트 블란쳇

‘선언’이란 도전적인 뜻을 지닌 제목의 영화 <매니페스토>에선 20세기 예술에 대한 선언을 낭독하는 13명의 케이트 블란쳇을 만날 수 있다. 케이트 블란쳇이 짚어주는 20세기 주요 예술 어록이랄까. 교사, 안무가, 앵커, 미망인, 걸인, 인형술사 등 직업도 외형도 천차만별인 13명의 캐릭터로 변신한 케이트 블란쳇이 강의를 통해, 리포트를 통해, 때론 몸을 통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미래주의 등에 대한 설명을 전한다.

본래 전시를 위한 설치 미술 작품으로 기획되었던 프로젝트. 전시 당시 동시에 재생됐던 13개의 영상을 한 편으로 편집해 영화 <매니페스토>가 탄생했다. 분장으로 인한 외형적인 변화는 물론, 말투, 목소리, 눈빛을 통해 아예 다른 인물을 탄생시키는 케이트 블란쳇의 각양각색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 ‘케이트 블란쳇 종합 세트’를 보고 싶은 그녀의 팬들이라면 주저 없이 선택해야 할 영화다.


: 7명의 누미 라파스가 서로 말하고 웃고 싸우는 재미

월요일이 사라졌다

감독 토미 위르콜라 출연 누미 라파스, 윌렘 대포, 글렌 클로즈

인구 증가를 통제하기 위해 1가구 1자녀, 산아제한법을 시행하는 정부. 테렌스(윌렘 대포)는 일곱 쌍둥이로 태어난 자신의 손녀를 정부에 맡기는 대신 몰래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먼데이, 튜즈데이, 웬즈데이, 써스데이, 프라이데이, 새터데이, 선데이란 이름을 받은 일곱 명의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요일에만 외출할 수 있다는 규칙을 부여받고 제한된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곱 명의 누미 라파스로 자란 쌍둥이들. 어느 날 맏언니 먼데이, 월요일이 홀연히 사라지고, 나머지 쌍둥이들이 정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기 시작하며 극에 속도감이 붙는다.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7명의 개성 강한 쌍둥이 캐릭터를 탄생시킨 누미 라파스의 연기력에 많은 빚을 진 영화다. 서로 웃고 대화하며 협력하고 싸우던 쌍둥이들, 그들의 연대에서 비롯된 우애의 공기까지 홀로 쌓아가야 했던 누미 라파스의 탄탄한 연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 “지금까지 한 연기 중 가장 어려웠다”는 소감을 밝힌 누미 라파스는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프로메테우스>의 쇼 박사를 제치고 자신의 인생 캐릭터를 갱신하는 데 성공했다.


: 성별, 나이, 인종의 벽을 없앤 분장팀

클라우드 아틀라스

감독 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톰 티크베어 출연 톰 행크스, 휴 그랜트, 할리 베리, 배두나, 짐 스터게스, 벤 위쇼, 휴고 위빙

핵 발전소의 거대 음모를 추적하는 추리극, 요양원을 빠져나오려는 노인의 코믹 모험담, 클론과 인간이 맞서는 미래국제도시의 풍경…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1849년부터 2346년까지, 500년의 시공간을 걸친 여섯 개의 스토리를 이어 붙인 영화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면 여섯 시대, 여섯 공간의 주인공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 1849년 이야기 속 인물들이 1936년에 다른 인물로 환생한 채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그들이 다시 1974년에 새로운 인물로 만나 비슷한 운명에 처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 말인즉슨, 에피소드마다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 배우들의 1인 다역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1인 3역은 기본, 1인 6역까지 소화한 주·조연 배우들의 색다른 모습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분장을 통해 나이와 인종, 성별까지 바꾼 배우들의 변화를 단번에 알아채긴 쉽지 않으니 말투나 목소리, 생김새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정확한 환생 계보를 확인하고 싶다면 엔딩 크레딧을 참조하자. 어떤 배우가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친절히 나열되는 깜짝 선물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 현지 기자들도 몰랐던 마티유 카소비츠의 1인 4역

얼굴도둑

감독 매튜 델라포테 출연 마티유 카소비츠

세바스찬(마티유 카소비츠)은 타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삶을 모방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런 삶의 방식에 회의감을 느끼던 찰나 그의 앞에 운명적으로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드 몽탈드(마티유 카소비츠). 몽탈트의 삶이 자신이 찾던 가장 완벽한 걸작임을 느낀 세바스찬은 몽탈트의 행세를 하다 그의 숨겨둔 아내와 아들을 마주하고, 평소보다 더 깊이 타인의 삶을 음미하기로 마음먹는다. 선을 넘어 타인의 삶을 침범해야만 안정감을 찾는 한 남자의 자아 성찰기. 특수 분장을 하면서 누구보다 생기 넘치는 눈빛을 하다가도, 제 자신의 삶을 살 땐 극도로 건조해지던 마티유 카소비츠의 극과 극 온도차 연기가 빛을 발한 작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작품 안에서 세바스찬 외 무려 세 명의 인물을 더 연기했다는 것. 극 중 세바스찬만큼의 존재감을 지닌 캐릭터, 세바스찬이 흉내 내는 몽탈드 역시 마티유 카소비츠가 연기했다. 뿐만 아니라 세바스찬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플로리스트 '샤롤'과 경찰서의 '드 보' 경감까지 그가 소화한 캐릭터라고. 프랑스에서 진행된 첫 번째 프리미어 당시 그의 1인 다역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니, 캐릭터처럼 다른 인물로 완벽 변신하는 데 성공한 마티유 카소비츠의 연기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 1인 165역! 주연보다 열일한 조연 배우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감독 팀 버튼 출연 조니 뎁, 프레디 하이모어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윌리 웡카 초콜릿 공장. 모든 게 비밀에 싸여있는 초콜릿 공장의 공장장 윌리 웡카(조니 뎁)는 웡카 초콜릿 속 황금 티켓을 찾은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공장과 초콜릿 제작 과정의 비밀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다. 우연히 주운 돈으로 초콜릿을 사 마지막 황금 티켓을 얻은 행운아 찰리(프레디 하이모어)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초콜릿 공장에 입성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어른 관객마저 넋 놓고 볼 수밖에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 눈길을 끄는 영화다. 초콜릿 폭포가 흐르고, 막대 사탕과 꽈배기 사탕이 열리는 나무가 있으며, 민트로 만든 풀이 자라는 곳! 그와 함께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독보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초콜릿 공장의 일꾼 움파룸파족. 165명의 움파룸파를 연기한 건 단 한 사람, 배우 딥 로이다.

팀 버튼 감독의 요구에 따라, 딥 로이는 움파룸파 각각의 동작과 표정을 다르게 연기했다.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연기를 펼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한 장면에 합성해 움파룸파족의 군무가 완성됐다고. 홀로 165인분의 연기를 소화해야 했던 딥 로이는 촬영 몇 달 전부터 동작 연기 지도와 리허설을 병행했고, 촬영에 들어서선 주연 배우들만큼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의 공을 높이 산 팀 버튼 감독은 그에게 출연료 10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했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