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모가 이룬 것이 정말 승리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가끔 악인을 볼 때면 궁금증이 일곤 한다. 날 때부터 사악한 사람 같은 건 없을 텐데 저자는 어쩌다가 저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딱히 악인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준다거나 “저놈도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었어” 같은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려는 건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드는 요인을 분석해서 콕 하고 짚어낼 수 있다면, 개인적인 요인은 각자 알아서 피하고 사회적인 요인은 다 같이 고치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 정도는 막연하게 한다. 선인과 악인이 무슨 제비뽑기처럼 정해져 있는 역할이 아닌 이상,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도 어떤 계기로 인해 악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요인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일도 시간낭비는 아닐 것이다.
<자이언트>(2010)의 조필연(정보석)이 처음 빠직 하고 악인이 되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아마 마흔이 넘도록 대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부산에서 썩어가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실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진급을 시켜줘도 부족한 마당에, 돈 없고 빽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진급에서 물을 먹고 오지로 발령이 났을 때, 보안반장 조필연 대위는 생각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고 말겠다고. 군무원들이 밀수한 금괴를 상부에 신고하는 대신, 자신이 빼돌려 중앙 정계에 비자금으로 상납하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만 해도, 그가 바라는 건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정도였을 테다. 금괴로 중앙 정계에 줄을 댈 수만 있다면 성골이 아닌 나도 원하는 만큼 올라갈 수 있겠지.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자신을 물 먹인 저 성골들과, 성골들만 성공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세상을 한껏 비웃어 주리라.
일단 올라가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올라가는 방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조필연은 제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밀치고 제끼며 미친 듯이 달렸다. 금괴를 빼돌리는 걸 막으려던 대수(정규수)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을 필두로, 금괴를 되찾으러 온 밀수꾼들을 협박하고, 자신을 방해하는 이강모(이범수)를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황태섭(이덕화)을 죽이려 들고, 황태섭의 손에서 만보건설을 빼앗고,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여당 중진 오병탁(김학철)을 암살하고… 거슬리면 버리고 필요하면 죽이는 길을 걸으며 조필연은 승승장구한다. 드라마가 시작할 무렵만 해도 어린 강모(여진구)가 아버지 대수와 함께 금괴 밀수 사건을 제보하러 왔을 때 옳은 일을 했다며 칭찬해주고 국가 경제를 걱정하던 청년 장교였던 조필연은, 세상을 향한 울분을 품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문 따위는 조필연에겐 통하지 않는다. 자기도 착실하게 실적 올리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 세상은 그 착실함에 어떻게 보답했는가? 그 시절엔 폐기처분 5분 전 상황까지 몰렸으나, 그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며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자 세상은 지위와 권력으로 보상하지 않았는가? 조필연은 자신이 세상의 비의를 깨달았다 여겼을 것이다. 이기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데, 착실하게 살아서는 이길 수 없는 세상이니까. 사람들이 정의니 순리니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걷는 길이야말로 세상이 바라는 순리라고 확신했을 테다. “난 정의 따위 믿지 않아. 정의는 인생의 패배자들이 들어놓는 보험 같은 거지. 적어도 인생의 패배자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을 테니까. 정의보다 중요한 건 바로 승리다! 이기는 것!”
물론 <자이언트>는 조필연으로 대표되는 개발독재 시대의 괴물을, 우직하게 사다리를 올라 그 괴물을 꺾은 양심적인 자본가 이강모가 꺾는 내용이다. 그건 선언 같은 것이었다. 세상이 비열하고 잔혹하다는 핑계로 자신도 그만큼은 비열하고 잔혹하게 굴어도 된다고 자기합리화를 했던 그 시절의 괴물들에 대한 증언이자, 어떻게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세상의 규칙을 한 뼘 씩이나마 바꿔 나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선언. 비록 조필연의 모델이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강모는 실존 모델이 없는 순수 창작의 결과물이었지만, 2010년에 이 작품을 볼 때만 해도 난 그 결론에 나름대로 만족했었다.
드라마 방영이 끝난 직후,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유인식 PD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강모가 이룬 것을 승리라고 읽느냐, 아니면 희망이라고 읽느냐 보다 승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는 식의 심드렁한 태도를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위험한 거니까. 강모가 이룬 것이 정말 승리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10년이 지난 지금, 유인식 PD의 말을 곱씹고 있자면 기분이 묘해진다. 강모가 조필연을 꺾고 세운 세상은 그렇다면 얼마나 더 정의로워진 걸까? 허허벌판이던 강남에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올라서고, 세계에서 손에 꼽힐 만큼 부유한 나라가 되었는데, 지금도 어딘가엔 끼니를 챙기지 못해 쓰러지는 이들이 있고 착실하게 꾸려온 삶을 배신당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어쩌면 다시는 세상을 핑계로 악인이 되는 조필연 같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세상을 만들 때까지, 우린 이긴 게 아닌 것이 아닐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