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서늘한 기운이 익숙한 요즘이다. 외로움이 전부였던 가을에 시작해,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계절들을 통과하는 소년의 성장을 그린 <월플라워> 속 음악을 곱씹어보자.


Asleep

THE SMITHS

말 못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인공 찰리(로건 레먼)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됐다. 첫 등교 전날 밤, 졸업식에 온 것처럼 행동하면서 현실을 뒤바꿀 거라고 친구한테 편지를 써보지만, 앤더슨 선생님(폴 러드) 외에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했다. 벌써부터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1384일이나 더 다녀야 할 뿐이다. 그나마 즐거움을 주는 건, 길다란 꽁지머리를 한 누나 캔디스의 남자친구 데렉이 만든 믹스테이프. 특히 스미스의 'Asleep'에 꽂혔다. 자정이 넘어서도 깬 채로 무언가를 적고, 여전히 적적한 하루를 보내는 찰리의 모습 위로 스미스 보컬 모리씨(Morrissey)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른다. "노래를 불러줘요, 잠들 수 있게. 더 이상 혼자 깨어나고 싶지 않아요." 'Asleep'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싱글의 비사이드로 발표된 노래다. 스미스의 여느 곡과 달리, 풍성한 밴드 사운드가 아닌 기타리스트 자니 마(Johnny Marr)의 피아노 연주에 음울한 가사를 읊조리는 모리씨의 목소리로만 구성됐다. 문득 들이닥치는 외로움을 마주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법한 노랫말.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만난 샘(엠마 왓슨), 패트릭(에즈라 밀러) 남매와 함께 식사를 하던 찰리는 샘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밴드와 그들의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어김없이 스미스의 'Asleep'을 말한다. 찰리가 남자친구 크레이그와 몸을 포개고 춤을 추는 걸 바라보는 신에선 모리씨의 'Seasick, Yet Still Docked'를 들을 수 있다.


Come On Eileen

DEXY'S MIDNIGHT RUNNERS

꽁지머리 데렉이 누나에게 손찌검하는 걸 목격한 다음 날, 홈커밍데이 파티에 가서도 혼자 구석에 서 있는 찰리는 어울려 노는 사람들(거기엔 캔디스와 데렉도 있다)을 가만히 쳐다만 본다. 느릿느릿한 노래가 끝나고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면 샘이 즉시 "오 마이 갓, 완전 좋은 노래 나오잖아" 하며 반응한다. 덱시스 미드나잇 러너스의 'Come On Eileen'이다. 샘과 패트릭은 "거실 대형"을 만들어 공간 한가운데를 차지해 있는 힘껏 온몸을 흔든다. 그 어떤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듯한 자유로운 몸짓. 찰리는 부러운 듯 그걸 바라본다. 파티에 자리한 수많은 사람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움직임을 키우고, 쭈뼛대던 찰리도 리듬을 타며 패트릭과 샘에게 가 다같이 춤춘다. 신스팝 유행이 한창이던 1982년에 발표된 노래답지 않게 신디사이저 소리 없이 바이올린과 브라스 등 아날로그적인 질감을 강조한 노래 'Come On Eileen'은 영국은 물론 미국 싱글 차트까지 점령하는 인기를 구가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Beat It'이 연속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걸 막은 기록으로도 회자된다. 80년대 최고의 영국 노래를 선정하는 리스트들에서 수차례 상위권에 오른 바 있다.


Here

PAVEMENT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홈커밍데이 파티에서 나온 세 친구는 밥의 집으로 향한다. 좋은 노래가 빵빵 울리는 공간에 들어서서 패트릭은 찰리에게 "이것이 파티야" 라고 말한다. 선생님의 시선에도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 거기에서 찰리는 메리와 앨리스도 소개 받는다. 대마가 든 브라우니를 먹고 완전히 흐트러진 모습까지 보여준 찰리는 샘에게 친구 마이클이 작년 5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고백한다. 종종 "친구에게" 하며 편지를 쓰는 바로 그 친구다. 샘이 만들어준 밀크셰이크를 여태껏 먹어본 것 중에 최고라며 홀짝이고 있으면, 샘은 패트릭에게 찰리의 사연을 알려주고 패트릭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찰리를 위해 잔을 들자고 한다. 그렇게 '월플라워'로 지낼 것 같았던 찰리는 "부적응자들의 섬"의 하나가 된다. <월플라워> 속 배경인 1992년에 발표된 페이브먼트의 데뷔 앨범 <Slanted and Enchated>의 트랙 'Here'가 '여기'에서 피어난 우정의 가능성을 나긋나긋 축복해준다.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

JOEY RAMONE

찰리는 여전히 마이클에게 편지를 쓰고, 종종 헬렌 이모와의 기억에서 허우적대지만, 순간순간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 1992년 가을에 만난 찰리와 친구들의 우정은 무르익어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된다. <월플라워>의 캐롤은 조니 라몬의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이다. 역사상 최고의 캐롤 앨범으로 손꼽히는 <A Christmas Gift for You from Philles Records>에 수록된 달린 러브(Darlene Love)의 노래를, 전설적인 펑크 밴드 라몬즈(Ramones)의 보컬 조이 라몬이 리메이크 한 곡이다. <월플라워> 사운드트랙이 1992년 이전에 이미 발표됐던 것들로 채워졌지만, 조이 라몬의 이 리메이크는 2002년에 나온 노래다. 1963년에 공개된 원곡을 70년대 말 펑크 신을 대표한 로커가 예전과 다름없이 투박하고 젊은 목소리로 부른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는 그저 옛날 노래처럼 들린다. 공부엔 영 젬병이었던 샘은 찰리와 함께 공부를 해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얻고, 그걸 축하하면서 크리스마스 파티 시퀀스도 시작된다.


Pretend We're Dead

L7

찰리는 샘을 사랑하지만, 메리가 그의 첫 여자친구가 된다. 무도회에 같이 참석하고 그 날 밤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입을 맞추고, 그렇게 얼결에 연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 남자친구 노릇을 하려 해도 자기와 메리가 너무 다르다는 걸 깨닫는 시간만 쌓일 뿐이다. 찰리와 메리의 로맨스가 삐거덕대겠다는 건 음악의 쓰임새로도 충분히 예상된다. 메리가 찰리를 처음 유혹할 때에도 집에서는 끈적한 무드와는 거리가 먼 로버트 앤 자니(Robert & Johnny)의 'Eternity With You'가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연애를 보여주는 시퀀스를 수식하는 L7의 'Pretend We're Dead' 역시 마찬가지. '우리가 죽은 것처럼 굴어봐' 라는 우악스러운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펑크송에서 첫 연애의 설렘 같은 건 단 1초도 느낄 수 없다.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의 첫 키스에 자세히 떠벌리고, 이마 묻은 검댕을 침을 묻혀 닦아주고, 앤더슨 선생님이 선물해준 책을 집어던지고, 시도때도 없이 전화통을 붙들면서도 자기 말만 늘어놓는 메리는 분명 찰리와 맞지 않는다.


Pearly-Dewdrops' Drops

COCTEAU TWINS

메리가 보는 앞에서 찰리가 돌연 샘에게 입을 맞춰 잠시 사이가 서먹해지지만, 위험에 처한 패트릭을 구해주면서 소원해진 관계는 금세 돈독해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샘과 패트릭이 졸업하는 날이 온다. 입학 첫날부터 졸업이 천일도 훨씬 넘게 남았다며 셈할 정도로 학교 생활은 고역인지라, 마치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듯, 학생들은 정각이 되자마자 환호하며 졸업을 자축한다. 콕토 트윈스의 'Purely Dewdrops' Drops'는 그들이 있는 힘껏 학교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모습과 함께 튀어나온다. 그 에너제틱한 순간에 무슨 음악인들 안 어울릴까 싶겠냐만, 콕토 트윈스의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졸업의 '기쁨'과는 다른 무드를 풀어놓는 것 같다. 공기가 희뿌옇게 차오르는 것 같은 느릿한 연주에 엘리자베스 프레이저(Elizabeth Frazer)의 노래는 분명 통상적인 쾌락과는 거리가 멀게 들린다. 이 노래가 향하는 곳은 금방 드러난다. 끝끝내 샘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다른 남자 곁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샘을 바라보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구들이 학교를 떠난 후의 생활을 마주해야 하는 찰리의 심정이다.


Heroes

DAVIE BOWIE

<월플라워>에서 가장 벅차오르는 두 번의 순간을 꾸미는 노래, 바로 데이빗 보위의 'Heroes'다. 밥의 파티에서 세 주인공이 친구가 되었음을 확인한 후, 그들은 한밤에 터널을 달린다. 패트릭이 옅게 들리던 음악의 볼륨을 높이면 샘은 "오 마이 갓, 이 좋은 노래는 뭐야?"라 묻고 패트릭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흥분에 겨워하던 샘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일어서서 밤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찰리의 말. "내가 무한해지는 걸 느껴." 그리고 이 순간은 영화 마지막에 변주된다. 이제는 좀 더 먼 거리에서 각자의 젊음을 통과해야 할 세 친구는 또다시 그 터널을 지나간다. 이번에 일어서는 건 찰리다. 너무나 아름다운 샘과 입을 맞춘 찰리 역시 바람을 느끼며 무한이 되는 그 순간을 만끽한다. 이 느슨한 대구는 찰리와 사랑이 앞으로 더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긴다. "나는 왕이 될 거야. 너는 여왕이 될 거고. (...)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어. 단 하루뿐일지라도."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 흩뿌려놓은 기타 노이즈가 보위의 낭창한 목소리를 뒤덮어버릴 것처럼 넘실대는 'Heroes'는 저 터널 너머 세상을 향해 질주하는 청춘의 얼굴과 뒷모습이 담기기에 더없이 완벽하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