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11번째 장편영화 <테넷>이 개봉했다. 현 코로나 상황에서 우여곡절을 안 겪은 작품이 어디 있겠냐만, <테넷> 역시 개봉되는 순간까지 여러 난관과 수차례 개봉일 연기 후 간신히 대중 앞에 도착하게 됐다. 원래 계획한 최초 개봉일은 7월 17일이었다. 전통적으로 7월에 개봉한 놀란의 작품들은 흥행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이 팬데믹으로 개봉 일을 바꾸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다가 7월 31일로 조금 미뤘고, 다시 8월 12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8월 26일로 확정됐다. 올여름 최초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한 블록버스터이기에, 그리고 <다크 나이트> 삼부작과 <인셉션>,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 등 만드는 영화마다 이슈를 불러오는 할리우드 최정상의 흥행성과 작품성을 거머쥔 놀란의 영화였기에, 모든 관심사와 기대감이 쏠린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를 뚫고 온 올여름 마지막 블록버스터
여름이 되면 가라앉을 거란 기대와 달리 코로나 확산이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20년 여름 개봉이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워너는 극장 외 개봉은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고, 놀란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철학과 전 세계 동시 개봉을 꾸준히 주장했기에 결국 8월 26일(미국은 9월 3일) 그대로 개봉을 강행했다. <테넷>은 놀란이 처음 시도하는 007 같은 첩보물로, 그의 본질적인 테마인 시간에 대한 관심사를 여전히 피력하는 동시에 변함없는 아이맥스 ‘70mm 필름’ 촬영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160만 피트(대략 100여 분)에 달하는 역대 가장 긴 아이맥스 필름 촬영 분량을 가진 영화가 되었다. CG에 대한 거부감도 여전해 놀란 영화 중 가장 긴 상영시간(150분)을 기록했지만, 가장 적은 CG컷(280여 컷)을 사용했다.
배우나 스태프에도 조금 변화가 있는데, 덴젤 워싱턴의 아들인 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로버트 패터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등이 처음 캐스팅됐고, <덩케르크>에서 나왔던 케네스 브래너와 놀란의 토템이자 상징과도 같은 마이클 케인이 출석도장을 찍었다. 편집은 <1917>로 인해 스케줄이 겹친 리 스미스 대신 <유전>과 <결혼 이야기>의 제니퍼 레임으로 바꿨으며, 음악도 <듄>으로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스 짐머 대신 <블랙 팬서>로 오스카를 수상한 루드비히 고란손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 12년간 놀란과 여섯 작품을 함께 해 온 한스 짐머의 교체는 다소 의외이기도 한데, 2019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 라이브 투어를 돌면서 대기 중인 작품만 무려 9편에 달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터라, 결국 놀란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란손을 직접 추천했다고 한다.
현실적인 질감을 선사하는 놀란표 스코어
그렇게 영화음악가가 바꿨음에도 <테넷>의 사운드는 얼핏 한스 짐머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감지된다. 사실 이는 딱히 짐머의 스타일이기보단(물론 현재 할리우드 스코어에서 짐머의 조류를 따르지 않는 작곡가가 어디 있겠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색채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데뷔작 <미행>부터 <프레스티지>까지 함께 한 데이빗 줄리안이나 <다크 나이트> 삼부작을 비롯해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덩케르크>까지 가장 정점에 있던 한스 짐머 그리고 이번에 처음 호흡을 맞추는 루드비히 고란손까지 놀란이 작곡가들에게 바라던 톤은 황홀한 선율의 테마나 화려한 심포닉 변주가 아닌, 무겁고 단조로운 리듬에 엠비언트적인 음향이 결합돼 볼륨과 베이스, 퍼쿠션으로 점층과 점강을 반복하며 긴장감을 생성시킨 하이브리드한 사운드였다.
이처럼 극도로 양식화되고 절제된 톤은 아무리 영화의 컨셉이나 상상력이 만화적이고 허황되어도 적게 쓰인 CG처럼 놀란의 영화에 놀랍도록 현실적인 질감을 부여했고, 단출하고 밋밋한 비주얼에 비해 더욱 크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일반적인 서사의 방식을 비틀어 영화적 구조로 시간을 입체화시키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의 스코어가 통용되지 않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놀란이었기에, 미니멀한 선율을 고수하고 감정선을 최소화하여 스토리에 몰입되게 했으며,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음향에 가까운 사운드는 가뜩이나 기능적인 음악을 더 한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데 집중한다. 이전까지 탁월한 멜로디 감각을 선보였던 한스 짐머조차 놀란의 세계에선 잿빛의 모노톤으로 물들어갔다. 현악 오스티나토나 헤비한 브라스, 질주하는 퍼쿠션은 그 매직 팔레트다.
짐머를 대신해 놀란과 처음 작업하는 루드비히 고란손
이런 점에서 <블랙 팬서>로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고, 차일디쉬 감비노를 비롯해 여러 대중가수들과 협연을 통해 그래미상도 거머쥐며, 디즈니+의 간판 시리즈로 떠오른 스타워즈 스핀오프 <더 만달로리안> 음악까지 꿰찬 루드비히 고란손과 놀란의 만남에 귀추가 주목되는 건 당연하다. 예상 가능한 놀란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지만, 자신의 인장을 슬쩍 남겨뒀던 짐머처럼 고란손 역시 자신만의 힙합 감성을 숨기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조율음이 이어지다 뚝 끊기며 경고음처럼 깔리는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힘찬 타악 비트, 부글거리는 일렉 사운드, 싸이키델릭한 기타가 어우러지며 휘몰아쳐가는 시작부터 기존의 영화음악은 잊으라는 듯 파워풀하게 영상을 지배해간다. <인셉션>과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등을 연상케 하지만, 모티브는 최소화한 채 그보다 더 공격적이고, 최면적인 펄스를 내뿜는 에너지들은 사운드 디자인에 가깝다.
물론 중간중간 스트링과 건반의 힘을 빌려 인물들(주로 가장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캣’에 얽혀있다)의 감정과 과거를 스케치하지만, 철저히 일렉트릭 사운드스케이프 안에 갇혀있기에 이 세계에 전혀 동조하지 못한 관객들에겐 다소 크고 불편한 소음으로 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고란손은 영화의 인버전을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의 진짜 호흡을 가공해 사토르의 공격성과 엔트로피가 거꾸로 흐르는 지점의 생경함과 불편함을 암시하는 한편, 과거 르네상스 시절 작곡가들이 작곡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던 카논의 기법 중 반행(Inversion: 상행하는 선율은 하행으로, 하행하는 선율은 상행으로 모방하는 기법)과 역행(Retrograde: 선율의 뒤에서 시작해 모방해가는 기법)에서 영감을 얻어 앞으로 들어도, 뒤로 들어도 비슷한 음을 구현해내며 색다른 재미와 쾌감을 안기기도 한다.
인버전된 세계, 진짜로 인버전된 음악
킥으로 사용된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꿈속의 시간에선 길게 늘어져 들린다는 것에 착안해 <인셉션>의 메인테마가 되었고, 시계초침과 셰퍼드 음 그리고 엘가의 ‘님로드’ 파편이 음악으로 활용된 <덩케르크>의 경우처럼, 이번 <테넷>에서도 인버전이란 영화 속 물리 법칙에 맞춰 백마스킹(역방향 재생)된 사운드가 실제 스코어와 동시에 진행되는 승부수를 던진다. 이 흔적은 Trucks in Place와 Inversion, The Algorithm, Posterity 같은 트랙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 왜곡과 변조된 사운드는 기괴하고 인위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는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방향 비주얼에 정확히 재단된 스코어이자 현재와 과거가 중첩된 시간을 담아낸 실제 음의 기록이기도 해 나름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놀란이 아닌 다른 감독이었다면 이 소음에 가까울 수도 있었던 무모한 시도를 감히 요구할 수 있었을까.
‘배트맨’이란 희대의 영웅을 다루면서도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고전적인 팡파르와 서곡을 지워버린 채 한스 짐머와 제임스 뉴턴 하워드라는 걸출한 멜로디마스터들에게 음울하고 어두운 사운드를 통해 트라우마에 허덕이는 캐릭터들과 고담이란 혼돈의 무대를 묘사하길 원했던 놀란이었기에, 고란손에게도 대중적이고 익숙한 분위기보단 대칭적이지만 현실에선 전혀 접할 수 없는 추상적이면서도 불확실성의 소리들과 만나길 원했다. 음악과 음향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첩보물이란 장르적 위치와 영화적 구조를 뒤흔드는 놀란의 야심을 모두 맞추기 위해 영화음악가가 새로이 꺼낼 카드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촬영 전부터 합류해 고란손이 고심한 이 독창적이고 괴상하기까지 한 음악적 회문(回文: 똑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단어나 문장)은 비교적 성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 퍼즐, 트래비스 스캇의 주제가
<메멘토>나 <프레스티지> 엔드 크레딧에서 기존의 노래들을 사용한 적은 있지만, 이번에 놀란 영화 최초로 오리지널 주제가가 흘러나온다. 힙합이자 일렉트로니카의 하부 장르인 트랩을 기반으로 오토 튠을 통해 자신만의 색채를 들려준 트래비스 스캇이(그 역시 영화 주제가는 처음이었다) 루드비히 고란손과 96년생의 젊은 프로듀서 완다걸(WondaGurl)과 함께 작업해 “The Plan”이란 곡을 불렀다. 영화 스코어 중에서 “Trucks in Place”의 베이스라인에 보컬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이 곡은 트래비스 스캇의 오토 튠된 목소리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며 <테넷>의 감흥을 고취시키는데, 놀란은 ‘테넷 퍼즐의 마지막 조각’과 같은 노래라며 치켜세웠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