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감 능력과 죄책감이 결여된 이들을 흔히 ‘사이코패스’라 일컫는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이들은 대다수 폭력적이며 광기적인 인격 장애를 앓고 있는데, 이는 강력 범죄자들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다.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때론 ‘악’ 그 자체로 보이기까지 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 그들을 소재로 한 범죄 스릴러 작품들을 소개한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작품들에 있어 잔인함의 수위가 높은 편이니 관람 전 주의하길 바란다.
4885… 너지?
<추격자>
감독 나홍진 │출연 김윤석, 하정우 │123분│청소년 관람불가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을 모티브로 완성된 <추격자>는 한국 범죄 스릴러의 새 장을 연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전직 형사이지만 현재는 출장안마소를 운영 중인 중호(김윤석)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눈치채고 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보편적으로 매체에서 다뤄지는 사이코패스는 영민하거나 체격이 좋은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인 영민(하정우)은 그 반대라는 점에서 설정에 클리셰를 깨며 호평받았다. 순박해 보일 정도로 덤덤하고 솔직한 대답에 때론 횡설수설한 모습까지, 현실적인 설정과 상황이 만들어 낸 밀도 높은 긴장감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격자>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판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5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한국 스릴러 수작 반열에 올랐다.
하나같이 그 소리군. 이럴 필요 없잖냐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122분│청소년 관람불가
코엔 형제가 연출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엔 그 흔한 OST 하나 흐르지 않는다. 오로지 삭막한 대지 위에서 돈 가방을 얻게 된 한 남자와 그를 쫓는 살인마, 이 둘을 추격하는 보안관 이렇게 세 남자가 이루어낸 긴장감만 일렁일 뿐이다.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타 사이코패스 캐릭터들과는 달리, 안톤 쉬거는 목적과 목표를 두고 움직이는 살인청부업자이지만 사실 특정 장면으로 미루어보자면 그 역시도 살인에 이유가 없는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본 이의 목숨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 점이(심지어 당사자는 자신이 목숨이 달려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렇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단발머리를 하고 있어 ‘미친 단발 살인마’라는 별명이 붙은 안톤 쉬거를 역대급 악역으로 탄생시킨 데는 그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공이 크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안톤 쉬거 역으로 2008년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BAFTA 등 세계 유수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다.
내가 완전 미친놈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메리칸 싸이코>
감독 메리 해론 │출연 크리스찬 베일, 윌렘 대포, 자레드 레토 │101분│청소년 관람불가
아역 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크리스찬 베일이 성인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된 <아메리칸 싸이코>. 범죄, 호러, 스릴러 장르라 하지만 실상은 상류층의 허황된 욕망이 어떻게 비틀어진 광기로 자라나게 되는지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에 더 가깝다. 뉴욕 월스트리트 중심가의 CEO 패트릭(크리스찬 베일)은 약혼녀가 있지만 자신의 친구 약혼녀와 바람을 피우는 부도덕한 상류층 남성이다. 그는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외적인 모습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꾸미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최상류층만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에 예약을 실패한 패트릭은 자신의 친구인 폴(자레드 레토)이 단골 고객으로 예약에 성공한 것을 알고 분노한다. 거기에 폴의 환상적인 명함(!)은 패트릭의 내면에 숨어있던 어두운 광기를 끌어내는 기폭제가 된다. 자신의 아파트로 폴을 데려간 패트릭은 도끼로 폴을 수차례 찍어 내려 살해하고, 패트릭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며 잔인하게 변해간다.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출연 이병헌, 최민식 │144분│청소년 관람불가
영등위(영상물등급위원회) 등급 분류 기준에 따르면, 국내 영화 상영 등급에는 다섯 가지가 존재한다. 전체 관람가부터 청소년 관람불가까지는 익숙하게 볼 수 있지만 나머지 하나, ‘제한 상영가’는 다르다. 제한 상영가 등급은 선정성이나 폭력성 등 표현이 과도해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국민 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어 일정한 제한이 요해질 때 매겨진다. 오로지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되어야 하는데, 한국에는 제한상영관이 없기에 상영될 수 없어 사실상 ‘개봉 보류’라는 것이 현실이다. 개봉 전 이 등급을 두 번이나 받았던 한국 영화가 있다.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악마는 보았다>다.
두 번의 심의 중 여러 장면을 삭제하고 나서야 겨우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아 개봉했다는 <악마는 보았다>는 쉽사리 추천하기에도 망설여지는 작품이다. 볼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것이 영화라지만 때론 단순 볼거리 그 이상으로 불쾌함과 트라우마를 안겨주는데, 이 경우가 그렇다. 그럼에도 이 리스트에 포함한 이유는 <악마는 보았다>가 밀어붙이는 힘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경철(최민식)과 약혼녀를 잃고 변해가는 김수현(이병헌) 두 사람의 폭발적인 연기와 박훈정 감독의 각본, 김지운 감독의 만남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상적인 시너지를 자아냈다.
내가 범인을 잡고 싶은 건지, 지금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조디악>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제이크 질렌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마크 러팔로 │157분│15세 관람가
<세븐>, <파이트 클럽>에서 보여주었던 속도감 있는 편집과 전개로 강렬함을 선사했던 스릴러의 귀재 데이빗 핀처 감독. 자신의 전매특허를 접어두고 157분의 긴 호흡으로 살인범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조디악>은 실제 1960∼7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희대의 연쇄살인마 ‘조디악’을 소재로 한 영화다. 아직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데이빗 핀처는 그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전시하기보다 그를 쫓았던 네 명의 남자를 조명하며 조디악의 흔적을 따라간다. 스릴러가 주는 긴장감과 쾌감은 떨어지지만 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명품 배우들의 연기와 데이빗 핀처가 촘촘히 각색한 조디악 사건 수사일지 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사이코패스한테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안 되지
<킬링 이브>
감독 데이먼 토머스, 존 이스트 등 │출연 산드라 오, 조디 코머 │총 시즌 3│청소년 관람불가
스파이물에, 그것도 여성 퀴어가 더해진다면? <킬링 이브>는 사이코패스 암살자 빌라넬(조디 코머)과 보안 요원 이브(산드라 오)의 집착 어린 추격전을 그린 영국 드라마다. 빌라넬은 명석한 두뇌를 지닌 킬러로, 냉혈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정반대의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런 빌라넬의 레이더에 새로운 먹잇감 이브가 걸려든다. 누구보다 현장 요원을 꿈꾸며 킬러들의 뒷조사를 해왔지만 평범한 사무직 요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브는 여성 킬러를 추적하는 비밀 요원으로 채용되면서 빌라넬의 뒤를 추격하게 된다. 이브의 추격을 알아차렸음에도 살인은커녕 이브를 욕망하는 빌라넬. 이브 역시 자신을 향한 빌라넬의 감정과 직업적 갈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2018년 호평 속에 시즌 1이 종영, 본격적으로 세계관을 확장하며 오는 6월 시즌 3까지 공개됐다. 주연을 맡은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산드라 오가 2019년 골든글로브 TV시리즈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