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좋겠다. 그냥 쳐다만 봐도 심장을 움직이는 눈빛을 가져서.”

-안정하(박소담)

“아! 너 그 멜로 눈깔 좀 어떻게 할래? 그런 눈깔로 보면서 얘기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매니저 이민재(신동미)

<청춘기록>

실로 그러하다. 안구정화, 반복시청, 무한캡처를 부르는 눈빛이다. 바삭한 마음을 적시고 탁한 공기를 씻어줄 것 같은 단비 같은 눈. <청춘기록> 안정하와 이민재가 7년 차 모델이자 신인 배우 사혜준(박보검)에게 하는 이 대사는 실제 박보검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유혹하는 데 10초면 된다고 외치던 이효리도 <효리네 민박>을 찾은 알바생 박보검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이실직고했더랬다. “보검아 넌 도둑놈이야. 여자들 마음을 훔쳐 가니까.”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석현(박보검)의 목숨을 잔인하게 거둬야 했던 김혜수는 그날의 촬영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보검 씨 눈을 보는데, 하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그 장면 찍고 울다 왔죠.”

<구르미 그린 달빛>

배우는 ‘시대의 페르소나’.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대리 체험해 주거나, 우리 삶을 대변해 주는 존재다. 굳이 따지자면 박보검은 전자에 가까웠다. 그는 대중이 갈구하는 이상적인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응답하라 1988>의 ‘천재’ 바둑 기사 최택이 그랬고, 달빛 같은 군주로 성장한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이영은 판타지 그 자체였으며, 반듯한 가정에서 결핍 없이 자란 <남자친구>의 진혁은 차수현(송혜교) 말마따나 청포도 같은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이 배우는 <청춘기록>을 통해 동시대 청춘의 고단한 삶도 대변해 주고 있다. 단순히 청춘 드라마 장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엇이든 가정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쉽지 않은 동시대 청춘의 얼굴을 사혜준을 빌어 들뜨지 않게 표현해 내고 있어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옛말이 된 수저계급론 사회를 예민하게 들춰내고 있기도 하다. 물론 <청춘기록>은 앞으로 무명 배우인 사혜준이 스타로 거듭나는 모습을 통해 또 하나의 판타지를 제공하겠지만(실제로 제작진은 사혜준이 본격 성공기가 펼쳐지는 9회부터를 2막이라 지칭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시대의 그늘을 통과한 사혜준의 모습은 박보검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로운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돈도 빽도 없지만 자존감은 단단한 사혜준 캐릭터는 연인과 있을 때, 부모와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 회사 대표와 있을 때 각기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입체감을 입는다. 그것에 눈길이 가는 것은 실제 우리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의 ‘나’와 부모님 앞에서의 ‘나’와 친구들 앞에서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르지 않나. 박보검은 다양한 관계 안에서 갈라지는 인간의 면모를 차별화해서 굉장히 현실감 있게 펼쳐내는 중이다. <청춘기록>이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도약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다.

<청춘기록> 시청자들이 “사혜준, 박보검 길 가자”라고 응원하는 것을 보면, 사혜준에게 박보검이 걸어온 길을 오버랩 해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드라마가 캐릭터에 실제 박보검 이미지를 적잖이 응용/변형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혜준과 박보검이 공유하고 있는 매력의 접점은 ‘바른생활 청년’ 이미지다. 전 국민이 스타의 인성을 검증하는 시대, 스타로 하여금 매스컴 앞에서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문제없는 사람일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시대에 <효리네 민박>에서 박보검이 보여준 예의 바른 면모는 ‘미디어에서 과대평가 받아 온 나쁜 남자’에 지친 대중의 눈을 심봉사처럼 번쩍 뜨이게 했다. 동료 배우들로부터 전해진 ‘박보검 미담’ 엑스파일도 이를 거들었다.

그런 박보검이 연기하는 사혜준 또한 곧다. 현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상황에서도 스폰 제안과 같은 유혹에 영혼을 팔지 않는다. “특권 의식이 몸에 뱄으면 좋겠어. (널) 본투비 스타처럼 만들 거야”라는 매니저에게는 “난 소박한 스타가 되는 게 좋아”라고 제동을 건다. 악연이 된 모델 에이전시 이태수(이창훈) 대표조차 인정할 건 인정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애 중에 사혜준이라고 있었거든? 걔를 처음 봤을 때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어. 외모도 외모지만 일단 인성이 좋아!” 배우와 캐릭터를 혼동하는 건 위험하지만, 박보검이 미디어에서 가꿔온 개별적 이미지는 바른 청년 사혜준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더 밀착시키게 한다.

<차이나타운>

박보검이 지닌 기질은 캐릭터를 정화시키는 면이 있다. 그의 영화적 자아들은 테스토스테론을 무분별하게 소비하지 않아 왔다. 그런 점에서 비교하면 흥미로운 배우가 강동원이다. 이 두 배우는 닮으면서도 다르다. 강동원이 거친 남자들 무리나 브로맨스 관계에서 여성의 대체재로서 무정형의 롤을 수행했다면, 박보검은 아예 여성들을 상대로 성 역할을 바꿔왔다. <차이나타운>에서 박보검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유형의 피해자를 연기했다. 수많은 장르물에서 여성들이 맡아 온 롤이다. 이혼한 재벌 여성이 평범한 집안의 신입사원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친구>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도돌이표처럼 재생된 신데렐라 스토리의 리버스 버전이었다. 쌍문동 어딘가에 정말로 살았을 것 같은 바둑소년 택은 덕선(혜리)에게 뿐 아니라 동성 친구들에게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낭랑18세 군주로 군림할 때도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기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다리고 배려하고 가까이 다가가도 되냐고 허락을 먼저 구하는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인의 보폭에 맞춰 사려 깊게 걷는 남자. 그것이 많은 여성들이 박보검에게 손을 흔드는 이유일 것이다.

‘착한 남자’ 시대가 열렸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잡을 수 없는 위험스러운 매력의 남성 캐릭터를 소구하려는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청춘기록> 이전까지 박보검에게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 뭐랄까. 반박의 여지 없는 꽃미모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호기심을 부르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독자적인 전복의 에너지를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는 조숙한 소년과 미숙한 어른 사이 어디 즈음에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박보검이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소년성과 동거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자 사람이라기보다는 막내 동생 같았달까.

<청춘기록>을 보고 박보검이라는 배우에 대한 생각이 뒤집힌 건,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박보검은 소년성에 의탁하지 않고도 부드럽고 선량한 기운을 흘리고 있으며 동시에 성인 남자로서의 매력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연기 특질 중 하나였던 어눌한 말투도 사혜준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박보검은 <청춘기록>에서 자신이 이제껏 쌓아 온 이미지를 견고히 지켜내는 가운데, 새로운 영역으로까지 영리하게 영토를 넓혔다. <청춘기록>에서 박보검이 획득한 지지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팬층까지 흡수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 같은 취향의 시청자들마저 그의 팬이 됐다.

<남자친구>

“군대는 숙제”라고 언급한 사혜준의 말대로, 남자 연예인에게 군대는 경력 단절을 염려하게 하는 달갑지 않은 숙제다. 그런 점에서 박보검은 이 숙제를 참으로 영리하게 풀고 떠난 인상이다. (표현이 조금 그럴지 모르지만) 그는 적금과도 같은 든든한 작품들을 남겼다. <청춘기록>은 물론이고, 군 복무 기간 관객을 만날 영화가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와 이용주 감독의 <서복>이라는 건 박보검을 굉장히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게 한다.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이 증명했듯 김태용 감독은 캐릭터에 마법과도 같은 매력을 불어넣는 데 선수인 연출자다. <서복>은 <불신지옥> <건축학개론>으로 사랑받은 이용주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모이는데, 이 작품에서 박보검은 심지어 복제인간이다.

이쯤이면 궁금한 건 박보검의 군 제대 이후다. (입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제대 후가 벌써 궁금해지면 어쩌자는 것인지.) 그동안 많은 남자배우들은 군 제대와 함께 남성미를 강조하는 장르물이나, 강렬한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거친 캐릭터를 통해 공백기를 메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박보검은 어떨까. 그 역시 유행에 몸을 맡길까.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얼굴을 품고 나타날까. <원더랜드>와 <서복>은 그를 또 어디로 데려다 놓을까. 그가 써 내려가는 청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