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은 "여성 이야기가 재미있다. 같은 여성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며, "무엇보다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내가 열심히 해야겠다"고 말해왔다.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부터,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등으로 여성의 얼굴에 주목해온 그는 스스로 한 다짐을 작품으로 꾸준히 이뤄내고 있다. 괴랄해서, 공감되어서, 혹은 대리 만족을 줘서,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 5편을 소개한다.


미쓰 홍당무 - 양미숙

감독 이경미 │ 출연 공효진, 이종혁, 서우, 황우슬혜 │ 100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명대사로 꼽은 대사가 있다.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 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다들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미쓰 홍당무>는 이경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에 참여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영화는 안면홍조증,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양미숙(공효진)이 서 선생(이종혁)의 사랑을 얻기 위해 비상식적인 행동을 벌이는 이야기다. 뭐, 서 선생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이상하지만 말이다. 열등감, 질투로 점철되어 비호감 끝판왕 캐릭터에 등극한 미숙지만, 그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잘난 이들을, 예쁨 받는 이들을 시샘하는 미숙. 보통 치부라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얼굴 뒤에 감추고 싶기 마련이다. 미숙의 열등감에는 그것을 감추려는 '척'이 없다. 사회와 동떨어진 것만 같은 미숙의 행동 때문에 이 캐릭터에 쉬이 정 붙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느낀 이들까지도, 끝내 '2번, 새 출발'을 선택하며 자신을 사랑하기로 한 미숙에 이입하게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소공녀 - 미소

감독 전고운 │ 출연 이솜, 안재홍, 강진아, 김국희 │ 106분

<소공녀>의 미소(이솜)는 비주얼부터 특별하다. 백발의 20대 전업 가사도우미 미소는 현실보다 취향을 우선시한다. 몸 뉠 곳은 없어도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월세와 물가가 오르자 미소는 담배 대신 집을 포기하고 대학 시절 함께 밴드부 활동을 하던 친구들을 찾아간다. 미소를 그저 세상 물정 모르고 낭만만 좇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실과 타협해서, 자신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마저 사치스러운 것이라 여겨야 한다고 규정해 버린 것은 세상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미소는 취향을 따르는 것이 비난이 향할 행동이 아니던 젊은 시절 속에 아직 사는 거고. 분명 미소가 하는 선택들은 엉뚱하고, 정미(김재화)의 말에 따르면 한심하기까지 하지만 미소는 "나는 여행 중"이라고, "지금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브루클린 - 에일리스

감독 존 크로울리 │ 출연 시얼샤 로넌, 에모리 코헨, 도널 글리슨 │ 111분

<브루클린>은 아일랜드 시골에서 자란 에일리스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가 브루클린에서 토니(에모리 코헨)와 결혼한 후 아일랜드로 돌아가 짐 패럴(도널 글리슨)을 만나는 순간들, 토니의 편지를 외면한 순간들을 놓고 비난한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향수병을 겪었던 에일리스는 '고향'이 주는 안정감이란 것을 느껴 잠깐 선택을 유보했다. 하지만 이내 에일리스는 토니에게 돌아간다. 낯선 곳에 떨어져서는 삶이 빛을 잃어 창백해져만 간다고 느낄 때 다가와 준 토니. 그리고 '마을의 스타'가 된 에일리스에게 다가와 준 짐. 지낼 곳도, 직장도, 안정적인 삶도 보장된 아일랜드를 에일리스가 한 번 더 떠난 이유는, 그 안정적 삶이란 것이 토니와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면 애초에 얻을 수 없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와일드 - 셰릴 스트레이드

감독 장 마크 발레 │ 출연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토머스 새도스키 │ 115분

고행을 고행으로 극복하다. 엄마의 죽음, 헤로인 중독, 이혼. 셰릴(리즈 위더스푼)이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4285km 극한의 하이킹이다. 영화는 셰릴의 여정과 플래시백을 번갈아 보여주는데, 플래시백은 주로 엄마 바비(로라 던)이 살아있어 행복하던 시절을 그린다. 그 사이에서 셰릴은 독백을 이어간다. '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낸' 셰릴. 그가 걷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영화를 봐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지만, <와일드>의 셰릴이 특별했던 또 다른 이유. 영화가 셰릴의 다양한 욕구를 스스럼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은 <데몰리션>에서도 아내의 죽음에 무감각한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바깥세상의 잣대를 가져다 놨을 때 가히 마땅치 않은 데이비스의 무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한 바 있다. 셰릴의 욕구는 솔직하다. 그는 등산을 준비하며 가방 한편에 콘돔을 챙긴다. 여정 중 들른 마을에서 화장품점에 들어가 그 꾀죄죄한 얼굴에 립스틱을 발라본다.


컨택트 - 루이스 뱅크스

감독 드니 빌뇌브 │ 출연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 │ 116분

SF 소설 거장 테드 창 원작, SF 영화 거장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영화. 어느날 미국 상공에 나타난 비행 물체. 지구에 나타난 외계 생명체 헵타 포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비행 물체로 투입되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와 과학자 이안(제레미 레너). 영화는 괴생명체 분석에 있어 과학, 수식으로 접근하기보다 언어로 접근한다. SF 영화이면서 대표적인 '언어 영화'인 셈이다. 이로써 <컨택트>는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드는 장치들을 이미 갖췄다.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 건 에이미 아담스의 루이스다. 극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기억하게 된 루이스를 중심에 둔다. 헵타 포드 어를 완전히 습득한 순간, 미지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같이 하게 되면서 미래에 당도(원제, Arrival)하는 순간은 루이스의 모든 선택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위에서 소개한 <와일드>의 셰릴과 <컨택트>의 루이스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남성 캐릭터에 종종 부여해왔던 특징을 여성에게 몰아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