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론 너무 가까이에서 너무 자주 부대끼는 탓에 오히려 서로를 더 모른다
노희경 작가가 2016년 선보였던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완(고현정)은, 자신의 엄마 난희(고두심)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는 일은 죽어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엄마 친구들이 자기만 보면 제 하소연 들어주고 운전해 줄 사람 취급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고, 입만 열면 잔소리인 엄마와 그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불려가는 것도 이제 좀 그만 하고 싶다. 그러나 완은 동시에 엄마 장난희 여사와 그의 친구들을 향한 애증에 가까운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니, 심지어 완은 엄마와 엄마 친구들을 ‘귀여워’ 하기까지 한다. 그 귀여움과 애틋함이 어찌나 절절했는지, 완은 결국 엄마가 노래를 부르듯 요구했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삶을 소재로 책을 쓰기’라는 대업에 도전한다.
“저게 말이 되나? 나도 울 엄마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엄마를 애틋해하고 귀여워하진 않거든. 심지어 엄마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어지기까지 하다니. 그건 노희경 작가나 되니까 상상할 수 있는 뭐 그런 거 아닌가?” 함께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던 친구가 ‘다 좋은데 이거 하나는 좀 비현실적’이라며 갸우뚱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을 때,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네가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어서 그래. 완이처럼 독립해 나와서 따로 살아 봐. 그럼 좀 알게 되는 부분이 생겨.” 친구는 따로 떨어져 살아서 더 보고 싶고 그리워지고 하는 거냐고, 너도 그렇냐고 물었다. 나는 별 다른 답 대신 사설을 읊듯 흥얼거렸다. 너도 나가서 살다 보면 알게 되는 날이 오니라.
처음부터 뿔뿔이 흩어져 살고자 계획을 가지고 가족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가족이든 언젠가는 흩어지게 되어 있다. 완과 장난희 여사처럼 자식이 장성해 독립을 하든, 희자(김혜자)네 둘째 아들처럼 해외로 떠나든, 이혼을 하거나 정아(나문희)와 석균(신구)처럼 별거를 하든, 계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가족들이 각자의 둥지 안에 홀로 남겨지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시점이 어느 가족에겐 빨리 오고 어느 가족에겐 다소 늦게 올 뿐이다. 누군가는 그게 서글프겠으나, 그게 과연 나쁘기만 한 일일까?
우리는 때론 너무 가까이에서 너무 자주 부대끼는 탓에 오히려 서로를 더 모른다. 상대를 ‘아내’, ‘남편’, ‘엄마’, ‘아빠’, ‘딸’, ‘아들’, ‘언니’, ‘오빠’, ‘누나’, ‘형’, ‘동생’으로만 바라보는 탓에, 그 관계를 벗어난 총체로서의 상대를 파악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벽화를 제대로 보려면 발걸음을 뒤로 물려 멀찍이 서서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때론 가족도 그렇게 몇 걸음 밖에서 봐야 제대로 보일 때가 있다. 가족 간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후에야, 우린 비로소 상대를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자식’이 아닌, 그냥 ‘인간 아무개씨’로도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같이 살 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단점도, 미처 실감하지 못해 고마워할 줄 몰랐던 배려도,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남이라고 생각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럭저럭 용서할 수 있었을 잘못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완이도 그랬다. 완은 자신의 연애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장난희 여사의 간섭이 달갑지 않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엄마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따로 살고 있는 것이고, 그 덕분에 징글징글한 간섭도 조금은 귀엽다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리라. 장난희 여사와 그의 친구들의 삶을 다룬 책을 내겠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테다. 이제 온전히 엄마와 대등한 눈높이로 서고 싶다는 마음에서, 엄마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이었겠지. 엄마가 그렇게 조르던 책을 내주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겠으나, 어르신들로 올려다보는 대신 취재 대상으로 대등하게 보다 보면 아무래도 미움이 가시게 되기 마련이다.
가족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한 지 26년, 완전히 뿔뿔이 흩어진 지는 7년차에 접어든 나는, 요새 나이 든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귀엽다. 집에서 나와서 살면서 칼럼에서 가족 이야기를 하도 자주 쓰다 보니, 나도 이제 나의 가족들이 조금은 ‘그냥 인간 아무개씨’로 보이기 시작한 셈이다. 이젠 “네가 결혼은 영 생각이 없더라도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같이 동거는 해 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을 건네는 아버지도 귀엽고, 아들이 칼럼마다 집안의 대소사를 야금야금 꺼내어 팔아먹는 걸 보면서 “넌 뭘 이런 이야기를 밖에 나가서까지 하고 다니니”라며 타박하는 어머니도 귀엽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게 영 무례하고 버르장머리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나.
그런 의미에서라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반드시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용서하고, 더 너그럽게 바라보며 기꺼이 귀여워할 수도 있는 기회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뿔뿔이 흩어지는 건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차라리 가족의 재해석인지도 모른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