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38년에 쓴 <레베카>는 설명이 필요 없는 심리 서스펜스 멜로물의 걸작이다. 굳이 최근 뮤지컬로 더 인기를 끌었다는 걸 언급하지 않아도, 1940년 동명의 영화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란 걸 상기시키지 않아도, 이 로맨틱하면서 고딕적인 색채를 지닌 원작은 지난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절판되지 않으며 꾸준히 팔려왔던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였다. 모리에는 네 번째로 발표한 <자메이카 여인숙>으로 호평을 받은 후, 스물아홉 살에 <제인 에어>와 제인 오스틴 소설들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품 <레베카>로 확고히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고,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섰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1940)

그녀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50여 차례나 영상화될 정도로(라디오와 연극, 뮤지컬,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높은 인기를 누려왔는데, 히치콕과는 처음 영화화된 <자메이카 여인숙>을 비롯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본작 <레베카>(불행하게도 히치콕 작품 중 유일하다)와 1963년에 동명의 단편인 <새>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하는 등 나름 인연이 깊다. <나의 사촌 레이첼>과 <돌아보지 마라>, <희생양>, <프렌치맨 크릭> 등 여러 다른 그녀의 작품들도 영상화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프니 듀 모리에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가장 많이 만들어진 건 바로 <레베카>다. 인도와 터키에서도 로컬라이즈된 작품들이 나왔고, TV시리즈 및 TV영화로도 열 차례 넘게 리메이크된 게 이를 방증한다.

벤 휘틀리 감독의 <레베카>(2020)

이번 2020년 가을 넷플릭스에서 벤 휘틀리 감독에 의해 새롭게 선보이는 <레베카> 공개에 맞춰, 1940년 오리지널 알프레드 히치콕 버전과 1997년 영국과 독일 합작으로 제작된 짐 오브라이언의 2부작 미니시리즈 버전, 그리고 이번 리메이크까지 <레베카> 음악들에 대해 소개해본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1세대 거장인 프란츠 왁스만과 영국 TV음악계의 베테랑이자 크리스토퍼 거닝 그리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개성적인 영화음악가 클린트 먼셀까지 저마다 색다른 해석과 솜씨를 부여해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레베카>의 음악은 배우들의 앙상블과 감독의 연출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레베카>(1940)

레베카 (1940)

음악: 프란츠 왁스먼

<레베카>는 사실 히치콕의 색채보다 그를 할리우드로 초빙한 거물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의 영향력이 더 많이 드러난 작품이다. 원작에 충실했다는 설명과 달리 셀즈닉은 당시 제작 풍토에 맞춰 각색된 방향과 후반작업(편집, 재촬영, 후시녹음 등)에 광범위하게 손을 대며 자신의 본분을 과시했다. 애초 음악으로 자신과 호흡을 맞춰 온 맥스 스타이너를 고려했다는 점도 그 일환 중 하나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지체되며 맥스는 참여할 수 없게 됐고, 그 대타로 뽑아 든 카드가 바로 프란츠 왁스먼이었다. 셀즈닉은 촬영 전 해 자신이 제작한 <더 영 인 하트>로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오른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레베카>는 왁스먼의 대표작이 되었고, 자신의 필모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기도 했다. 이후 같은 원작자의 <나의 사촌 레이첼>이 영화화됐을 때 왁스먼이 음악으로 선택된 건 우연이 아니다.

<레베카>(1940)

<레베카>(1940)

왁스먼이 <레베카>에서 가장 고민했던 건,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레베카를 어떻게 음악적으로 구현하나였다. 이전에 <프랑켄스타인의 신부>에서 ‘옹드 마르트노’라는 초기 전자악기를 활용한 바 있는 그는 이번엔 해먼드 오르간과 유사한 ‘노바코드’란 전자 오르간을 사용해 죽었어도 사라지지 않고 대저택을 무겁게 지배하고 있는 초월적인 캐릭터를 서늘하게 묘사해냈다. 주인공 ‘나’를 위해 로맨틱하고 발랄한 왈츠를 초반에 배치하고, 맨덜리 대저택의 위용과 드 윈터의 어둠과 비련, 댄버스 부인의 히스테리컬한 집착을 클래식컬한 선율로 담아냈다면, 중반 이후 이들 곁에서 부유하는 레베카의 존재는 전혀 질감의 소리를 가져와 충돌시키며 서스펜스를 강화하고 주제에 부합해간다. 무려 80년 전에 왁스먼은 이런 혁신적인 시도와 완성도를 선사했다.


<레베카>(1997)

레베카 (1997)

음악: 크리스토퍼 거닝

TV시리즈로 만들어진 <레베카> 중에선 가장 최근에 방영됐던 이 2부작 영드는 국내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출연진 면면은 나름 탄탄하다. <007과 여왕>의 본드 걸 출신이자 <왕좌의 게임>의 올레나 티렐 역으로 잘 알려진 다이아나 리그가 댄버스 부인으로 출연해 에미상을 거머쥐었고, 같은 미드의 타이윈 라니스터 역과 여러 편의 할리우드 영화들 조연으로 활동해온 찰스 댄스가 드 윈터를 맡아 중량감을 선사한다. 아울러 주인공을 맡은 에밀리아 폭스는 조안나 데이빗의 딸로 엄마도 1979년 BBC에서 방영한 <레베카> 4부작 미니시리즈 버전에서 주인공을 맡은 바 있는 족보(!)있는 집안 출신이기도 하다. 이 앙상블에 탁월한 음악을 배치하는 건 70년대부터 영국 TV에서 주로 활동하고, 멜 토메와 셜리 배시, 홀리스, 콜린 블런스톤, 색소폰 연주자 필 우즈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도 협업해온 백전노장 크리스토퍼 거닝이다.

<레베카>(1997)

크리스토퍼 거닝

국내에선 영드 <포아로> 시리즈나 에디트 피아프의 전기물 <라비앙 로즈>의 영화음악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반세기 전 고전적이면서 도전적인 방식을 택한 프란츠 왁스먼과 달리 소박하지만 격정적인 선율로 귀를 사로잡는다. 영화보다 적은 예산의 TV물이라는 지점에서 한계를 인식하고 30인조가 조금 넘는 오케스트라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영국의 시골 풍광과 캐릭터들 간의 로맨스와 비극에 더 집중한다. 특히나 처연하면서도 묵직한 첼로 솔로를 앞세워 현악 앙상블이 주는 사랑과 불안, 공포와 미스터리의 조화는 익숙하고 낡은 스토리에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서정적인 목관부와 피아노가 조화돼 우아한 기품과 예스러운 서스펜스를 품어낸 테마는 전혀 왁스먼을 연상케 하지 않지만, 다른 의미로 왁스먼이 활동하던 그 시절 할리우드 스코어들이 가진 향수와 기능을 철저하고 훌륭하게 모사해냈다.


<레베카>(2020)

<레베카>(2020)

레베카 (2020)

음악: 클린트 먼셀

코로나19와 관계없이 일찌감치 넷플릭스에서 배급하기로 결정된 벤 휘틀리의 <레베카>는 극장 개봉을 안 한다는 게 호재일지, 아님 넷플릭스 자체 제작은 아쉽다는 편견을 강화시키는 악재가 될지 모르겠지만, 공개된 초반 썩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진 못하다. 릴리 제임스와 아미 해머,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라는 황금 조합에도 원작이 가진 고딕적인 매력과 히치콕의 서스펜스를 모두 잡기엔 다소 미흡했다는 평이다. 하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두 번째 작업한 <레퀴엠>의 음악으로 일약 주목받는 영화음악가가 된 클린트 먼셀의 스코어만큼은 앞선 작품들과 완연한 차이를 보이며 흥미로운 소리를 들려준다. 현악이 주가 돼 낭만적인 상황과 심리적인 긴장을 모두 잡아낸 것에서 더 나아가 얼터너티브 락밴드 출신답게 기타를 내세우고, 일렉트릭 첼로와 ‘악마의 악기’로 불리는 유리 하모니카까지 동원해 섬세한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레베카>(2020)

이는 프란츠 왁스먼이 ‘노바코드’로 레베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감을 조성했던 방식과 유사한 지점인데, <레퀴엠>과 <천년을 흐르는 사랑>, <노아>, <러빙 빈센트> 등에서 선보였던 먼셀의 미니멀한 선율이 중첩돼 레베카 존재의 모호함과 미스터리한 느낌을 강화시키는 건 물론, 주인공과 드 윈터, 댄버스 부인의 속내까지도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 저음부의 웅웅거리는 효과들은 마치 안개에 뒤덮인 것과 같은 답답함과 지독한 의심, 두려움을 자아내며, 과거와 기억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을 상징한다. 다만 이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과거 왁스먼이나 거닝의 스코어와 달리 먼셀의 음악에서도 로맨틱한 감성이나 장르적인 긴장감은 조금 희석됐다. 반복과 점층으로 엔딩을 향해 고조되지만, 정작 그 끝에 이르러선 순식간에 휘발되어버리는 무던한 모던함이 아쉽게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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