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난 후 오랫동안 제목을 곱씹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영하의 바람>이 그렇다. <영하의 바람>은 기형도의 단편 소설 <영하의 바람>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어린아이들의 절망과 슬픔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소설은 유사한 카테고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 내막은 전혀 다르다. 영화를 연출한 이유리 감독은 그저 ‘영하의 바람’이라는 표현에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영하의 날씨라던가 차가운 바람이 아닌 영하의 바람. 영하의 바람이라는 시적 표현이 주는 중의적 의미에 매력을 느낀 그는 시나리오 속 주인공의 이름도 영하로 바꿔가며 제목 짓기에 공을 들였다.

물론 그 공은 헛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쉬이 정리되지 않는 감상과 감정의 근원에 제목이 있다. 제목이 주는 여운이 긴 영화다. 영화의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들이 순차적으로 찾아와 마음을 뒤흔든다. 영하라는 소녀가 꿈꾼 어떠한 바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영하(零下)의 온도로 한 소녀의 성장을 채찍질하는 혹독한 바람에 대한 이야기. 김유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며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감독조합상을 수상한 영화 <영하의 바람>이다.


12살의 영하

15살의 영하

19살의 영하

<영하의 바람>은 영하라는 10대 소녀가 겪어낸 뼈아픈 성장기를 그린 영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한 소녀의 아름다운 성장기가 아니다. 성장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도 미안할 만큼 냉혹하고 불행한 현실에 처한 10대 소녀 영하(권한솔)의 서글픈 일기장이다. 영하의 일기는 크게 12살, 15살, 19살의 그가 마주해야 했던 차가운 현실을 7년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12살의 영하는 부모로부터 버려짐을 당했다. 이혼 후 새살림을 차린 엄마(신동미)는 어린 소녀를 홀로 트럭에 태워 아빠의 집으로 보낸다. 그러나 도착한 집엔 아빠가 없었다. 아빠는 영하를 버리고 떠났다. 그렇게 12살의 영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이삿짐과 나란히 길거리에 남겨졌다. 부모라는 버팀목이 무너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진 그 날, 영하는 처음으로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갈 곳 없는 영하는 다시 엄마와 새아빠(박종환)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영하의 마음속엔 그 어떤 행복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자리 잡는다.

19살의 영하를 연기한 배우 권한솔.

그렇게 3년 뒤, 15살의 영하는 단짝 친구이자 사촌인 미진(옥수분)과 헤어지며 다시 한번 냉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한다. 이모라는 명목으로 미진 부모의 사망 보험금을 몰래 몰래 쓴 엄마는, 파렴치하게도 미진의 할머니가 죽자 미진을 내쳐낸다. 멀리 사는 친척에게로 떠나는 미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영하는 인생의 2번째 성장통을 겪는다. 본인들의 삶에 어떠한 결정권도 없이 오로지 어른들의 선택으로 원치 않는 불행을 겪게 된 두 소녀는 나란히 10대의 끝자락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겐 마치 지금까지의 강풍은 맛보기였다는 듯 더욱 혹독하고 차가운 영하(零下)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 <자위전쟁> <상실의 기억> 등을 통해 주인공이 처한 비극의 상황들을 그려온 김유리 감독은 <영하의 바람>을 통해 한 소녀가 가족 안에서 겪는 부조리함과 차가운 현실을 담아냈다. 그 누구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저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하의 이야기는, 영하의 상처는 더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니까. 우리의 곁에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이기에 영하의 비극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매일 같이 미디어에 쏟아지는 가족 간 학대 사건들을 접하는 우리들에게 영하가 겪어낸 비극은 드라마틱한 픽션이 아닌 실제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영하가 겪은 가정 내 부조리한 사건들은 물리적인 학대의 단편이라기보단 7년 동안 점진적으로 쌓여온 파편이 터지며 벌어진 일들이기에 영하가 마주한 아픔이 더욱 깊숙이 느껴진다.

영하의 엄마를 연기한 배우 신동미

영하의 새아빠를 연기한 배우 박종환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이 힘들었던 이유는 비단 영하의 고통만이 느껴져선 아니었다. 영하라는 캐릭터의 비극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던 건 영하의 엄마 은숙과 새아빠 영진이 만들어낸 현실성 덕분이기도 하다. 영하가 겪는 불행의 제공자라 할 수 있는 엄마와 새아빠를 비난받아 마땅할 캐릭터로 그려냈다면 편했겠지만, 영화는 그들을 향해 비난과 비판을 쉬이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영하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했던 엄마, 가장으로서의 제 몫을 해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맘처럼 되지 않자 가출을 결심한 엄마를 향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지점들을 통해 결국 영화는 모든 책임의 화살을 편리하게 엄마나 아빠에게 돌리기보단 관객들 스스로 여러 방면의 질문을 하게 만든다.


미진과 영하의 엄마 은숙

앞서 여러 차례 강조한 현실성을 통해 <영하의 바람>은 관객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특히나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부조리함에 우리가 얼마나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가족이라서, 가족이기 때문에,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상처를 입혀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 그리고 모든 가정 내 불화를 그들만의 일로 치부해버리는 우리의 미온적인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고작 10대의 영하가 무려 7년의 세월에 걸쳐 부모님의 이혼과 버려짐의 슬픔, 새아빠의 성추행, 엄마의 가출, 그리고 이로 인해 몸을 전시하는 고액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과정을 겪을 동안 영하를 구하는 어떠한 구원의 손길도 없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영하’의 불행이 어느 순간 방향키를 틀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져 올 수밖에 없었던 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무관심의 결과인 것이다.

15살의 영하와 새아빠 영진

영하의 담담한 서사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만이 폭력이라 치부했던 생각들, 그로 인해 방치된 영하와 같은 아이들. 그들이 견뎌내야 할 마음속 상처와 현실적인 살아내기에 너무나도 안일한 태도를 취했다는 생각이 스며들어 관객들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를 연출한 김유리 감독 역시 이와 관련해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당한 행위 이전에, 누군가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이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몫은 누군가가 저지른 부조리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마다 아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지점이다.


미진을 연기한 배우 옥수분

영하와 미진

세차게 몰아치는 <영하의 바람> 속에도 한 줄기의 희망은 있다. “세상은 홀로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던 영화 속 냉랭한 대사와는 달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순간들을 영하와 미진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위태로운 영하의 옆엔 끝까지 미진만이 남아있고, 마지막으로 영하의 이름을 불러주는 자도 미진이다. 미진이 영하를 현실적으로 구원해줄 순 없겠지만 흔들리는 영하의 곁에 누군가의 온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마음이 놓인다. 실제로 김유리 감독은 “누구에게나 영하의 바람이 몰아치는 시기에, 단지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어왔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내내 생각하면서 영화를 완성했다”고 밝혀왔다. 이렇듯 <영하의 바람>은 사회적인 제도의 변화나 학대 가해자의 처벌 보단 지금 당장 영하의 옆에 있어 줄 미진과 같은 존재의 필요성을 확대해 보여준다.

(왼쪽부터) 배우 권한솔, 배우 옥수분

영화 속에서 19살의 영하와 미진의 얼굴은 신예 배우인 권한솔과 옥수분이 그렸는데, 이들은 우리의 곁에 실재하는 인물처럼 캐릭터가 마주한 불행과 성장의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신동미, 박종환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물론 이 두 신예 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영하의 바람>은 2020년 11월 14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되는 <제6회 세이브더칠드런 온라인 아동권리영화제>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상영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영하의 바람> 티켓 구매 방법 및 영화제 소개에 관한 상세 내용은 하단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유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