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이나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계보는 길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 제작된 작품들은 대체로 판타지나 판타지 멜로물에 가까웠다.
각자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두 남녀가 서로와 연락을 나누며 상대를 구해낸다는 플롯의 영화 <동감>(2000)과 <시월애>(2000), 나라가 망하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벼랑으로 몸을 던진 백제의 공주 부여주가 현대의 한국으로 떨어져 현대인으로 환생한 전생의 인연들과 만나게 된다는 내용의 드라마 <천년지애>(SBS, 2003), 현대 한국의 의사가 과거로 넘어가 역사에 개입한다는 내용의 <닥터 진>(MBC, 2012)과 <신의>(SBS, 2012), 세자빈을 잃은 조선시대 왕세자가 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려다가 현대 한국으로 넘어온다는 설정의 <옥탑방 왕세자>(SBS, 2012)까지. 대부분의 작품들은 시간을 넘어 로맨스를 이루거나 판타지를 실현하는 쪽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무전기로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형사가 교신을 주고받으며 미제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시그널>(tvN, 2016),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던 1986년의 형사가 3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로 와서 아직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의 수사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터널>(OCN, 2017), 2018년을 살던 형사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후 정신을 차려보니 1988년에 도착해 있었다는 설정의 <라이프 온 마스>(OCN, 2018), 돈 되는 일만 골라 하던 변호사가 사고를 당한 이후 평행세계로 떨어져 정의 구현을 위해 뛰는 검사로 일하며 원래 세계에선 지키지 못했던 연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의 <웰컴2라이프>(MBC, 2019)….
이전까지는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판타지적 설정이 주는 쾌감과 그를 통해 시간을 뛰어넘은 로맨스를 쌓아간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면,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절박하게 시간을 되감는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동시대인들의 무의식 안에 새겨 놓은 트라우마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날 우리 모두가 보았던 참혹함과 잃었던 소중함을 떠올릴 때마다, 누구든 시간을 되감고 싶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 시간을 되돌려 조금만 더 일찍 해경이 출동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선내에 있던 사람들에게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하지 말고 얼른 구명조끼를 입고 밖으로 나가라고 경고해줬다면 어땠을까. 아니, 사람들이 그 날 그 배에 타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면, 배가 위험한 구조 변경을 하도록 허가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온 나라가 회한과 후회, 충격과 상실감을 가슴에 품게 된 그 날부터,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과거와 연락을 한다는 상상, 혹은 지금과는 다른 평행차원으로 건너간다는 상상은 더 이상 장르적 쾌감의 도구가 아니라 한을 풀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고통과 슬픔을 오래 바라보았던 작품인 <시그널>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장면은 아마도 이재한 순경(조진웅)이 혼자 영화관에서 오열하는 4회의 장면일 것이다.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던 1989년의 이재한은, 미래의 프로파일러 박해영 경위(이제훈)와 무전기로 교신하며 사건의 진범을 찾아 헤맨다. 내심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동사무소 직원 김원경(이시아)에게 연정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재한은 사건을 해결한 뒤 당당하게 고백하자는 생각으로 말을 꺼내는 걸 뒤로 미룬다. 그러나 원경은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의 9번째 피해자가 되고, 재한은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원경을 구하는데 실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황망해하던 재한을 찾아온 원경의 이모는, 조심스레 영화 표 두 장을 건넨다. 원경이 이순경님이랑 같이 보러 가려고 사뒀던 영화표라고, 이순경님이 안 좋아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이명세의 <개그맨>(1989)이 상영되고 있는 극장 안, 모든 관객들이 폭소하는 가운데 이재한만이 혼자 소리 죽여 오열한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손 내밀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둘이서 함께 영화를 보러 올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더 일찍 알고 더 일찍 구했다면, 정말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텐데.
그래서 <시그널>은, 그 한을 어찌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미제사건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작품인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살아 가라고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 너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스러지고 다치지 않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손을 뻗고 그들을 살펴보고 지키라고.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지만, 현재가 과거가 되기 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려 노력해보는 건 가능할 테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