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장르가 로맨스라지만 유독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 찾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도 선명한 화질과 색감이 두드러지는 디지털 영화가 아닌 1990∼2000년대 초 필름 특유의 감성이 서려 있는 로맨스 영화들이 말이다. 클리셰로 무장한 유치한 스토리라 해도 당대의 빈티지함과 이상한 낭만이 깃들어 있는 로맨스 영화들을 몇 번이고 찾아보게 되는 건 기자뿐만이 아닐 터. 이맘쯤이면 고질병처럼 괜스레 헛헛해지는 마음을 채워 줄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다섯 편을 선정해봤다. 뻔한 목록일 수 있겠지만, 뭐 어떤가. 보고 또 봐도 좋은 게 명작 로맨스인 것을.


기온이 21도인데도 춥다는 널 사랑해,

샌드위치 주문에 1시간이 넘는 널 사랑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감독 로브 라이너 │출연 빌리 크리스탈, 맥 라이언 │123분15세 관람가

1977년 시카고 대학. 해리(빌리 크리스탈)는 뉴욕으로 가기 위해 여자친구의 친구인 샐리(맥 라이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으로 출발한다.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해리는 긍정적인 샐리와 가는 내내 설전을 벌이고 두 사람은 서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채 헤어진다. 그리고 5년 후,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또다시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설전을 벌인다. 도착지에서 미련 없이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내디딘 그들은 5년 뒤 서로 연인을 잃고 마주한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다르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던 해리와 샐리는 10년 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며 관계에 변화를 맞이한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하나의 명제를 두고 시작한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가능한가’. 답도 없는 이 질문을 두고 해리와 샐리는 각각 남자와 여자를 대변하듯 의견을 피력한다. 영화는 어떤 답을 내놓게 될까. 90년대 로맨틱 코미디의 요정이라 불리는 맥 라이언이 주연을 맡아 사랑스러운 샐리를 연기했다. 낙엽으로 가득한 뉴욕 센트럴파크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늦가을에서 초겨울 보기 좋은 클래식한 로코 수작이다.


그날 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자기가 내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비포 선셋>(2004)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79분15세 관람가

9년 전, 비엔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를 보내게 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 6개월 뒤 재회를 약속한 채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진 두 사람은 9년이 흘러 파리의 한 서점에서 조우하게 된다. 꿈같았던 하루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해왔던 제시와 셀린은 그간의 안부를 건네며 점점 9년 전 그날의 감정으로 다가간다.

90년대 로맨스물의 바이블로 꼽히는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작 <비포 선셋>. 영화는 비엔나에서 파리로 무대를 옮겨 두 사람을 조명한다. 다소 판타지 같았던 사랑에서 한 발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영화와 함께 고스란히 나이를 먹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다시 한번 제시와 셀린으로 불러들였다. 하루의 시간을 담은 전작에 비해 단 몇 시간만을 담은 <비포 선셋>은 두 사람이 올라탄 유람선에서 맞이한 짙은 노을빛과도 닮았다. 더 넓어진 감정의 진폭과 씁쓸해진 현실의 그림자는 두 사람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갈지. 깊어가는 가을, 영화를 본 후 줄리 델피가 직접 부른 ‘Waltz for the night’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는 건 필수다.


당신이 날 완벽하게 만들어(You complete me)

<제리 맥과이어>(1996)

감독 카메론 크로우 │출연 톰 크루즈, 르네 젤위거 │138분15세 관람가

능력과 뛰어난 외모를 겸비한 스포츠 에이전시 매니저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약혼녀까지 있는 출세한 삶이지만

선수들의 무례한 행동들에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만 들 뿐이다. 어느 날, 자신의 선수가 네 번째로 큰 부상을 입게 되고, 경기 출전을 말려달라는 어린 아들의 부탁에 메뉴얼대로 대답하자 욕을 먹는다. 자신을 회의감에 들게 했던 선수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자기 환멸이 든 제리는 다음 날 회사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인간’이라는 제안서를 돌리지만, 회사의 이익과 반한다는 이유로 결국 해고당하게 된다. 한편, 맥과이어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던 미혼모 도로시(르네 젤위거)는 새로운 에이전시를 꾸리겠다는 제리의 뒤를 따라 에이전시를 그만둔다. 그렇게 제리와 도로시는 에이전시를 키워나가다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지만, 일도 사랑도 순탄치 않게 흘러가고야 만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이전, 르네 젤위거에겐 <제리 맥과이어>가 있었다. 신인이었던 그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준 이 영화는 톰 크루즈의 리즈시절까지 덤으로 볼 수 있는, 본격 눈 호강 영화로도 유명하다. 일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성장영화의 면모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제69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및 5개 부문의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톰 크루즈는 아쉽게도 남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했지만 그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데 성공했다.


사랑 이야기의 종류는 딱 두 가지야,

남자가 여자를 놓치는 거나 여자가 남자를 놓치는 것 그게 다야

<뉴욕의 가을>(2000)

감독 조안 첸 │출연 리처드 기어, 위노나 라이더 │105분15세 관람가

제목부터 가을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뉴욕의 가을>은 <귀여운 여인> 리처드 기어의 출연작으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로맨스 영화다. 자신의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을 찾은 샬롯(위노나 라이더)은 레스토랑의 주인 윌(리처드 기어)과 묘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끌린다. 50세의 나이이지만 여성편력이 심한 바람둥이 윌은 샬롯에게 대시를 하고 샬롯은 그런 윌에게 속절없이 빠지고 만다. 그러나 윌의 바람기에 샬롯은 상처를 받고 그와 멀어진다. 한편, 샬롯을 잊지 못한 윌은 샬롯을 찾아가고 그의 할머니로부터 샬롯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소개할 영화 중 감정적인 여운이 가장 긴 <뉴욕의 가을>.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의 나이 차이 때문에 진입장벽이 있는 편이지만 절절하게 변해가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이입되며 잊히니 괜찮다. 뉴욕의 가을 풍경과 감성을 스크린에 담아내어 대리만족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마지막 황제>(1987)부터 최근 <오살>(2019)까지 배우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중국 배우 조안 첸이 메가폰을 잡은 할리우드 영화다.


잊지 마세요.

나 역시 한 소년 앞에 서서 사랑을 구하는 한 소녀일 뿐이에요.

<노팅 힐>(1999)

감독 로저 미첼 │출연 줄리아 로버츠, 휴 그랜트 │124분12세 관람가

<노팅 힐>이라면 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지만, 로맨스 명작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빠지면 섭섭하다. 유명 연예인과 평범한 일반인의 사랑을 그린 전형적인 판타지 스토리임에도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두 주연 배우의 호연에 있다. 휴 그랜트의 헝클어진 머리와 젠틀한 영국 발음, 줄리아 로버츠의 싱그러운 웃음은 <노팅 힐>이 오랜 시간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런던의 노팅 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는 오렌지 주스를 사서 돌아오던 길에 모퉁이에서 유명 영화배우인 안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와 부딪힌다. 안나의 옷에 오렌지 주스를 쏟은 윌리엄은 안나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며칠 뒤, 안나는 윌리엄을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초대하고 윌리엄은 여동생의 생일파티에 안나를 깜짝 손님으로 데려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영화의 성공과 함께 엔딩에 삽입된 OST 'She'가 대히트를 치며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