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 제임스 본드”를 처음 은막에서 읊조렸던 원조 007, 숀 코네리가 지난 10월의 마지막 밤에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03년 <젠틀맨 리그>로 은퇴한 후 거의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꾸준히 스크린에 복귀할 거라 바라던 팬들도 적지 않았다.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며 1950년대 중반부터 단역 배우를 시작했던 그는 007시리즈에 캐스팅되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후 <도청작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로빈과 마리안>, <대열차 강도>, <아웃랜드>,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장미의 이름>, <하이랜더>, <러시아 하우스>, <떠오르는 태양>, <앤트랩먼트>, <파인딩 포레스터> 등에 출연하며 나이가 들수록 더 멋진 관록과 여유를 보여주던 배우였다. 숀 코네리가 인상적으로 등장했던 영화들과 영화음악들을 골라보며 그를 추모해본다.


골드핑거 (1964)

음악 : 존 배리

숀 코네리는 로저 무어와 더불어 가장 많은 7편의 007 영화를 찍었다. 그중 두 번은 배역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했다. 그만큼 숀 코네리의 제임스 본드는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그중에서 우열을 꼽는 건 무의미하겠지만, 가장 기억할 만한 작품이라면 단연 시리즈 3번째인 <골드핑거>다. 007 시리즈의 모든 초석을 다져놓은 건 바로 이 영화에서였다. 그전까지 이언 플레밍 원작에 기대 성공한 일개 영국 첩보물은 할리우드 자본과 시장을 등에 업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프랜차이즈로 자리매김했다. ‘공상과학’급의 비밀무기를 제공하는 코드명 Q와 본드 카가 처음 등장하며, 여체를 배경으로 한 타이틀 시퀀스에 주제가가 깔리는 전통도, 그 주제가 선율을 007 테마와 섞어내 스코어로 구사하는 방식도 여기부터였다. 존 배리가 본격적으로 음악의 주도권을 잡고, 자신의 역량을 폭발시킨 것도 <골드핑거>였다. 첫 편 <닥터 노>에서 편곡과 연주를 담당하던 그는 2편 <위기일발>로 솜씨를 인정받고, 이 작품으로 브라스 섹션과 재즈 색채가 두드러진 현재의 익숙한 스파이 뮤직을 재정립했다. 이후 존 배리는 9편의 007 음악을 더 맡으며 007 프랜차이즈에 가장 중요한 족적을 남긴다.


마니 (1964)

음악 : 버나드 허먼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가 고착화될 것이 두려웠던 숀 코네리는 <골드핑거>를 찍는 동시에, 히치콕과 만나 심리 스릴러 <마니>에도 참여한다. 기존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이었던 케리 그랜트나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코네리의 색다른 변신은 인정받는다. 히치콕에게도 <마니>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오랜 기간 함께한 황금기 시절 동료들과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다. 촬영감독 로버트 버크와 편집자 조지 토마시니는 이 작품 후 얼마 뒤 타계했고, 음악을 맡은 버나드 허먼과는 차기작 <찢어진 커튼>을 작업하다 결별해 실질적으로 <마니>가 최후의 결과물이 되었다. 이 작품은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한 <현기증>이나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아왔지만, 필모 중 가장 낭만적이면서 보다 세련된 강박관념의 사운드를 펼쳐 보인다. 휘몰아치듯 반복되며 고조되어가는 스트링 편성의 긴장감은 명불허전이고, 영화상에서 탁월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후에 이 모티브와 분위기는 고스란히 <조이 인 더 모닝>과 <검은 옷을 입은 신부>에 재활용되기도 했다. 유행에 따르지 않은 허먼을 결국 히치콕은 져버렸지만, 이후 히치콕의 작품들을 보면 사실 히치콕에겐 그 유행보다 허먼이 더 필요했을지 모른다.


왕이 되려던 사나이 (1975)

음악 : 모리스 자르

본드 역할에서 벗어난 숀 코네리는 보다 다양한 감독들과 만나며 부지런히 여러 작품들에서 모습을 비췄다. <더 힐>이나 <자도즈>처럼 작고 파격적인 영화도 있었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나 <머나먼 다리>, <지구의 대참사>같은 초호화 앙상블 영화에도 등장했다. 할리우드 거장인 존 휴스턴과 친우인 마이클 케인과 함께한 리디어드 키플링 원작의 이 영화도 그 일환 중 하나다. 존 휴스턴의 오랜 숙원 사업과 같은 프로젝트였고, 코네리와 케인 역시 맘에 들어 한 이 작품의 음악은 이국적인 할리우드 대작들에서 두각을 나타낸 프랑스 영화음악가 모리스 자르가 담당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로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고, <쇼군>이나 <타이판>, <사막의 라이언>, <꿈꾸는 아프리카> 등 전 세계 방방곳곳의 풍광을 묘사한 작곡가답게 이 영화에서도 배경이 되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너머의 ‘카프리스탄’을 묘사하기 위해 고전 인도 음악가들을 모셔와 행진곡 풍의 메인 테마와 혼용해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제국주의와 욕망에 관한 블랙코미디이자 어리석은 모험담을 위해 자르가 만들어낸 이 호화로운 에픽 스코어는 데이비드 린과 함께한 대표작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으며 흥겨움과 아름다움 뒤로 짙은 페이소스와 무상함을 안긴다.


바람과 라이온 (1975)

음악 : 제리 골드스미스

1904년 모로코에서 실제 있었던 미국인 “페르디카리스” 납치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존 밀리어스 감독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스펙터클한 모험극으로, 애초 아랍의 피가 섞인 오마 샤리프나 멕시칸인 앤소니 퀸 등을 염원했지만 최종적으로 숀 코네리(!)가 낙점돼 (밀리어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스필버그가 만든) <죠스>의 광풍 속에서도 살아남아 흥행에 성공했다. 스코틀랜드 태생임에도 천연덕스럽게 아랍 전사를 연기해낸 코네리의 호쾌한 카리스마가 제국 시대적 분위기를 낭만적으로 묘사해낸 영화의 약점을 가려버린다. 무엇보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일급 장인 제리 골드스미스가 들려주는 이국적이면서도 장대한 영화음악이 일품인데,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선배 모리스 자르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박력과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다. 전쟁물과 웨스턴물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타악기들과 금관악기군을 내세워 규모와 액션의 음악을 들려주는 전형적인 골드스미스의 스타일로, 당해 존 윌리엄스의 <죠스>만 없었다면 모든 영화음악상은 <바람과 라이온>이 휩쓸었을 만큼 그의 경력 중 가장 훌륭한 사운드트랙을 완성해냈다. 로맨스와 액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영화만큼이나 음악 역시 환상적인 조화를 가져온다.


언터처블 (1987)

음악 : 엔니오 모리꼬네

스펙트럼이 넓지 않은 연기로 뭘 해도 숀 코네리라는 악평을 듣던 그였기에 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거라 여겨졌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로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거머쥔다. 연륜이 쌓인 멘토로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충고해주는 캐릭터는 비슷한 시기 먼저 공개된 <하이랜더>와 닮아있는데, 케빈 코스트너와 앤디 가르시아, 로버트 드니로 등의 배우 앙상블 속에서 현실적이고 묵중한 존재감으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크게 어필됐다. 갱스터물과 영웅담 사이에서 절묘하게 조율하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인상적인 음악도 한 몫 하는데, 유럽에선 인정받았지만 할리우드에서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던 그의 솜씨를 만천하에 드러낸 탁월한 쇼케이스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이 오롯이 할리우드 제작표 영화라 할 수 없기에, <언터처블>의 성공을 발판 삼아 엔니오 모리꼬네는 할리우드에서 더 나은 감독들과 좋은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음침하고 어두운 테마로 시작해, 진득한 느와르와 따스한 가족 테마를 거쳐, 승리의 찬가로 끝을 맺는 이 놀라운 스코어는 마치 엔니오 모리꼬네의 할리우드 도전사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데, 압축적으로 그의 음악세계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인디아나 존스 3: 최후의 성전 (1989)

음악 : 존 윌리엄스

<리오에서 온 사나이>와 소설 “알란 쿼터메인”, 만화 “땡땡의 모험” 그리고 007시리즈 등에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숀 코네리의 출연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건지 모른다. 인디아나 존스의 고지식한 아버지로 나와 해리슨 포드와 케미로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이 세 번째 작품은 스필버그식 80년대 엔터테인먼트의 진수였다. 스필버그와 환상의 짝패를 이루는 존 윌리엄스의 음악을 언급하지 않으면 실례인 수준인데, 7∼80년대 최전성기 시절에 위치해 있는 작품답게 그야말로 완벽한 스코어를 들려준다. 프랜차이즈 특성상 가장 유명한 테마의 반복은 쉬 피로감을 줄 수 있기에, 기존에 가장 알려진 행진곡 풍의 레이더스 테마 사용을 필요할 때 이외에는 사용을 자제하며, 대폭 새로운 테마들을 활용해 신선함을 안긴다. 성배가 주요한 모티브로 발현되고 평생을 바쳐 이를 추적해 온 아버지 헨리 존스를 위해 종교적인 색채를 부여했으며, 수많은 추격전 속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을 위한 경쾌한 스케르초와 악으로 대표되는 나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아낸 모티브, 부자만의 관계를 대변하는 사운드까지 풍성한 재료들이 제공되며 만족감을 안긴다.


붉은 10월 (1990)

음악 : 바질 폴레두리스

테크노 스릴러라는 장르를 개척한 톰 클랜시의 전설적인 데뷔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이후 계속해서 영상화되는 잭 라이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애초 마르코 함장 역은 클라우스 마리아 브랜다우어가 캐스팅됐으나. 촬영 2주 만에 하차하게 되고 그와는 여러모로 인연이 있는 숀 코네리가 대타로 투입됐다. 스코틀랜드 억양이 강한 그가 러시아 함장 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말이 많았으나, 전후 3년간 왕립 해군에서 근무했던 전력답게 카리스마와 분위기로 절묘하게 끄덕이게 만든다. 존 맥티어난의 탁월한 연출과 얀 드봉의 촬영도 빛이 났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바질 폴레두리스의 파워풀한 스코어다. 이미 <코난 더 바바리안>과 <로보캅>, <아그네스의 피>, <아이언 이글>, <젊은 용사들> 등 남성적이고 밀리터리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준 바 있는 그는 여기서 옛 소련의 프로코피예프를 연상케 하는 차갑고 대담한 사운드로 냉전 시대 분위기를 탁월이 담아내었다. 조금 아쉬운 건 음악 예산이 삭감되며 그가 원한 비전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고, 80년대 특유의 전자음악 효과들이 오케스트레이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조금은 거슬린다는 점이다.


더 록 (1996)

음악 : 닉 글래니 스미스, 한스 짐머,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

연기파 배우였던 니콜라스 케이지를 액션 스타로 변모시키고, 마이클 베이를 폭발성애자로 거듭나게 했으며, 돈 심슨의 마지막 제작물로 제리 브룩하이머를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듀서로 자립(?)시킨 배경에는 바로 이 영화 <더 록>이 있다. 마치 제임스 본드가 늙어서 은퇴하지 못하고 체포됐다면 이런 사연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은 캐릭터를 숀 코네리에게 부여한 이 작품은 미노년의 포스를 보여준다. 이 화끈한 액션영화에 기름을 붓는 영화음악을 만들어낸 건 바로 미디어벤처 소속의 닉 글래니 스미스와 한스 짐머,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 3인방이다. 짐머가 두 번째로 나오는 크레딧이 말해주듯 일단 음악의 기본적인 베이스는 짐머 사단에서 지휘를 담당하는 닉 글래니 스미스가 맡고, 짐머가 서포트를 그리고 당시 신인급이었던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가 추가음악을 맡은 형국인데, 정확한 배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짐머가 <더 록>을 그리 호의적으로 언급한 편이 없다는 걸로 봐서,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노의 역류>와 <고공침투>, <크림슨 타이드> 등을 거쳐 <더 록>에서 스타일을 완성을 이루며 현재 짐머표 액션 사운드를 정립시켜준 작품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스코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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