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소개하기 전 잠시 올여름으로 돌아가 보자. ‘언론 권력의 제왕’이라 불리며 군림했던 폭스뉴스의 회장 ‘로저 에일스’를 끌어내린 세 여성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로저 에일스의 상습적인 성추행을 고발하기 위한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 케일라(마고 로비)의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그리고 스캔들의 당사자, 로저 에일스의 시점에서 그를 조명한 드라마 <라우디스트 보이스>가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 인물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1995년 폭스 뉴스를 창립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회장 자리에 오른 로저 에일스의 흥망성쇠를 다룬 전기 드라마다. 1990년대부터 2017년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미국 언론과 정치의 풍경을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글래디에이터>, <레미제라블> 등으로 국내 대중들에게 익숙한 배우 러셀 크로우가 로저 에일스로 변신해 명연기를 펼쳤다. 12월 16일 왓챠에서 익스클루시브로 독점 공개되는 <라우디스트 보이스>에 대해 정리해봤다.


<라우디스트 보이스> 속 로저 에일스

로저 에일스

공화당의 킹 메이커, 시청률 1위 ‘폭스뉴스’ 설립자 로저 에일스

로저 에일스는 언론인이자 리처드 닉슨, H.W 부시 전 대통령 등 공화당 정치인들의 미디어 전략가, 킹 메이커로 활약한 정치인이다. 그는 1996년 출범한 케이블 채널 ‘폭스뉴스’의 설립자다. 폭스뉴스는 현재 미국 보수층을 사로잡으며 케이블 보도 전문 채널 18년째 시청률 1위라는 부동의 기록을 유지 중이다. 그는 뛰어난 경영 수완과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무기로 삼아 뉴스의 왕으로 군림해왔다.

<라우디스트 보이스>의 이야기는 1995년 CNBC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 로저(러셀 크로우)가 ‘뉴스 코퍼레이션’, ‘21세기 폭스’의 회장 루퍼트 머독(사이먼 맥버니)으로부터 폭스뉴스 창립 멤버를 제안받으며 시작된다. 미국 내 보수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현존하는 어젠다에 맞설 채널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로저는 1년의 출범 준비 기간을 6개월로 단축시키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하고, 그렇게 출범한 폭스뉴스는 ‘MSNBC’, ‘CNN’과 경쟁하며 보수층을 집결 시키기 시작한다.


제왕에서 추악한 폭군으로,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되다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뉴욕 매거진 편집인 가브리엘 셔먼이 2014년 집필한 로저 에일스 전기 ‘더 라우디스트 보이스 인 더 룸’(The Loudest Voice in the Room)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셔먼은 책을 집필하기 위해 600여 명이 넘는 사람과 로저에 대해 인터뷰를 했으며, 이를 토대로 1980년대 NBC 방송국에서 로저가 “여직원들에게 임금 조건 협상을 빌미로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2014년 제기된 성 추문은 묻히는 듯했으나 2016년 폭스 뉴스의 앵커였던 그레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으로 고소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로저 에일스는 그레천 칼슨의 계약 만료를 이유로 삼아 보복성 고소라고 반박했으나, 23명의 여성들이 잇따라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면서 결국 사임하게 됐다. 전 세계적으로 터진 미투 운동의 시작점이 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행 스캔들이 터지기 1년 전이었다.

드라마는 로저 에일스의 성공 신화를 다루는 한편, 후반부 그레천의 등장과 함께 드러나는 로저의 추악한 이면에 집중했다. 텔레비전의 힘을 믿고, 무엇이 옳은 저널리즘의 자세인지 열변을 토했던 한 남자의 불명예스러운 추락.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욕망의 탈을 쓴 멘토였던 그의 본 모습과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는 미국 정치사가 맞물리며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밀도 있는 전개로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못 알아볼 뻔! 러셀 크로우x시에나 밀러x나오미 왓츠의 열연

드라마의 몰입감을 끌어올리는 요소로는 촘촘한 서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의 역할이 가장 클 터. 유명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실존 인물 로저 에일스로 완벽히 분한 러셀 크로우는 단언 이 드라마의 일등 공신이다. 그는 매 촬영마다 최소 6시간에 걸친 특수분장을 통해 로저 에일스로 거듭났다. 거대한 몸, 검버섯이 가득한 노인의 얼굴과 같은 분장 속에서도 대중 매체를 분석하는 로저의 예리함과 형형한 눈빛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2020년, 러셀 크로우는 <라우디스트 보이스>로 <체르노빌> 자레드 해리스를 꺾고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TV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호주 대형 산불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간 참이라 시상식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총 제작에도 참여해 프로듀서로서 제 역할을 해내며 드라마를 이끈 일등 공신이 됐다.

(왼쪽부터) <라우디스트 보이스>, <더 셰프> 시에나 밀러

(왼쪽부터) <라우디스트 보이스>, <씨 오브 트리스> 나오미 왓츠

주연 외에도 시에나 밀러, 나오미 왓츠가 참여해 러셀 크로우와 탄탄한 연기 호흡을 선보였다. 시에나 밀러는 로저 에일스의 아내 엘리자베스 에일스 역을 맡아 맹목적으로 남편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묘한 섬뜩함을 선사한다. 나오미 왓츠는 폭스 뉴스의 앵커 그레천 칼슨으로 변신, 성 추문 스캔들을 터트리며 드라마의 후반부를 힘 있게 몰고 가는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9.11 테러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엮어낸 수작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로저 에일스의 노년을 조명한 전기 드라마임과 동시에 약 20년간의 미국 정치사를 함축해낸 정치 드라마라는 점에서 수작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그저 작은 케이블 채널에 지나지 않았던 폭스뉴스가 어떻게 급성장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는 단 2회 만에 ‘9.11 테러’를 소재로 사용하며 언론과 정치의 융합을 본격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비행기 테러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 그리고 그 순간 이것이 기회임을 눈치챈 로저는 테러가 난 건물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화면에 송출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청률 급등에 성공한 폭스뉴스는 소위 ‘가짜 뉴스’도 마다하지 않고 보수층을 겨냥한 자극적인 언행과 보도를 이어간다. 2009년 미국 대선과 오바마 전 대통령의 당선, 재임,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까지 폭스뉴스의 베일 뒤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2020년 미국에선 새로운 대통령 바이든이 당선됐다. 로저 에일스는 세상을 떠났고, 드라마도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건재한 듯한 기시감을 느끼며 여전히 혼란스러운 미국을 마주하고 있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