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쌌던 거지,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러니까 낡은 크레인을 썼던 거지.”
히어로물 속 주인공이긴 하지만,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속 주인공 은영(정유미)은 남들보다 특별히 더 정의롭거나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내가 다 처단하겠다’라는 의지나 영웅심리로 가득한 사람도 아니고, 인간을 향한 애정이 넘쳐나 끝내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인류애의 화신도 아니다. 다만 그에겐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게 보이고, 마침 그걸 무찌를 능력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원념, 기억이나 영혼이 남기고 간 흔적인 ‘젤리’투성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은영은, 일단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당장 눈앞에 문제가 보이니까, 그런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으니까.
학교 제자인 완수(심달기)와 민우(이석형) 사이에 불길하게 얽혀 있는 젤리다발이 못내 신경 쓰였던 은영은, 한문교사 인표(남주혁)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 사이의 자장이 서로 얽히지 않도록 두 사람의 겨드랑이털에 매듭을 지어준다. 잠시 기절시켜 둔 아이들의 겨드랑이에 전통매듭을 지어주고 아이들이 깨어나길 기다리던 인표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근데, 애들 사이에 뭐가 있든, 우리가 그걸 끊어 놓을 자격이 있을까요…? 그건 어쩌면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교사는 늘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인표의 곱고 옳은 말들을 가만히 듣던 은영은 모든 게 다 지겹고 피곤하다는 듯 인표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한다.
“아, 그냥 씨발 다들 졸업해 버려, 썅.”
은영도 그냥 못 본 척 놔두면 모든 게 편하다. 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 사달이 날 텐데. 정말 다들 졸업해 버려서 눈앞에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자기 코앞에 애들이 젤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꼴이 보이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쌍욕을 하면서도 애들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매듭을 묶고 있는 거 아니겠나.
그러니까, 팔뚝으로 제방의 구멍을 틀어막은 네덜란드 소년 한스 같은 거다. 한스도 제방에 난 구멍을 막을 만한 다른 도구가 옆에 있었거나, 구멍의 사이즈가 당장 시급한 게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도 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거나, 힘을 합쳐 함께 둑을 막아줄 사람이 마침 옆에 있었다면 굳이 제 목숨까지 바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한스도 그게 아니라서 끝내 제방의 구멍을 막고는 얼어 죽은 것 아닌가. 은영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눈에 안 보이거나, 자기 말고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있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서 은영은 마지못해 나선다. 매번 나서기 싫은 티를 팍팍 풍기며,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욕설을 웅얼거리며.
그날도 그랬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크레인 사고로 사망한 은영의 옛 친구 강선(최준영)은, 혼이 흩어지기 전 젤리의 형태로 은영을 찾아온다. 막연하게 크레인 사고 같은 게 나면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강선은 자신 쪽으로 크레인이 꺾여 떨어지는 걸 보고도 피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고층부 작업을 한다고 최대한 늘려 두었던 크레인은 하중이 실리자 순식간에 꺾였다. 젤리가 된 강선은 피식 웃으며 회고한다.
“비쌌던 거지,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러니까 낡은 크레인을 썼던 거지.”
젤리 형태가 부서져 가던 마지막 순간, 강선은 은영에게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길 거라며 학교를 그만두라고 권한다. 은영은 울먹이며 답했다.
“그만두고 싶어. 다 그만두고 싶어.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을 어쩌겠어, 당해야지. 네가 크레인을 피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야.”
강선이 뻔히 덮쳐오는 크레인을 보면서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숨졌던 것처럼, 은영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불운을 보고도 피하지 못한다. 자기 말고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산산이 흩어지는 강선의 젤리를 바라보던 은영은 꿈을 꾼다. 전설 속 괴물 같이 하늘 높이 뻗어 있는 크레인타워를 보며, 자신이 그랬듯 거대한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맞았을 친구를 생각하던 은영은 장난감 광선검과 비비탄 총을 떨구고 오열하며 중얼거린다. 이걸로 나 혼자 어떻게 싸워, 김강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는 어떻게 할 수 없어도, 크레인타워 정도는 외롭지 않게 우리도 좀 같이 싸워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가 한참이다. 매일 예닐곱 명의 구의역 김군이, 김용균씨가, 은영의 친구 강선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산업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현장의 안전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업에 중대재해의 책임을 지워서 그 예닐곱 명이 무사히 퇴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 원론적인 법안은, 어째 논의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점점 후퇴 중이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의 발의안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원청 대기업이 아니라 하청 중소기업에만 피해를 몰 수 있다는 우려가 일자,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50인 미만 사업장 등에는 법 적용을 4년 간 유예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나마 28일 국회에 제출된 정부 단일안은 ‘발주만으로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부담시키는 건 과잉’이라는 이유로 발주자를 책임 범위에서 삭제한 채 제출됐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원청 대기업도 하청 중소기업도 빠져나갈 수 있는 법안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미 10만명의 시민이 손을 내밀어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함께 해 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더 정의로워서, 인류애가 넘치고 선의지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손을 내밀었겠는가. 눈에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나 자기가 신경 안 써도 괜찮은 일이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내민 거겠지. 당장 눈앞에 오늘도 예닐곱 명이 퇴근하지 못하고 죽어갔다는 뉴스가 보이는데, 외면할 순 없지 않은가. 은영이 늘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모두가 쏘아 올린 공은 이제 법을 만들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외면할 수 없어서 다시 광선검을 손에 쥔 은영처럼, 물이 새는 제방의 구멍을 팔뚝으로 틀어막은 한스처럼,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사람을 살리자고 목소리를 내는 데 10만명의 목소리에 그들이 성의껏 답할 차례다. 새해에는,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올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