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야 할 집에서 가장 불안한 마음으로 트라우마를 얻고 있을지 모른다.

<마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릴 적에는 아이들을 싫어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에 대한 공포였다.

아이에 대한 나의 거부반응이 조금씩 줄어든 건, 길에서 유기묘를 구조해 키우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고양이는 늘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으로 무언가를 절박하게 요구했고, 그럴 때마다 수명이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뭐가 부족하니? 물이니? 사료니? 화장실 치워줘야 할 때가 됐나? 간식이야? 놀아줄까? 때로는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울고 있는 고양이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화를 낸다고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거나 사람이 고양이의 울음을 알아듣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내 새끼 귀한 걸 알게 된 뒤에야, 남의 집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양육자들을 보면, 안쓰러운 눈으로 전우애 비슷한 걸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고, 그 쪽도 말이 안 통하는 존재에 사랑을 쏟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두 번째 자취방도 거부반응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3층짜리 양옥의 2층에 세 들어 살았는데, 그 집의 북향으로는 놀이터와 어린이도서관이 있었고, 서향으로는 어린이집이 있었다. 양옥의 1층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어린이집 원아들은 점심을 먹기 전 지도교사 선생님의 인솔 하에 놀이터에서 두 시간가량 노래를 부르고 비명을 지르며 뛰어 놀았는데, 점심을 먹으러 어린이집으로 들어갈 때면 5분씩 인원 점검을 위해 다 같이 “목련반 모여라!”를 외치곤 했다. 아이들이 뛰놀고 비명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환경이었는데, 참 희한하게도 그게 금방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었다. 모르는 애들의 소음이라고 생각할 땐 그저 시끄러웠는데,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받아들이며 ‘이웃집에 사는 같은 동네 아는 애들이 내는 소리’ 라고 생각하니 그 소리들이 새삼 달가워졌다. 그래, 내겐 저 지칠 줄 모르는, 도통 말이 안 통하는 존재들이 계속 저렇게 떠들며 자랄 수 있는 마을을 함께 만들어야 할 책임이 1/n 정도는 있는 거로구나. 그 뒤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듣는 게 낙이 되었다.

안다. 이것도 필경 내가 직접 키우는 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속 편한 이야기일 것이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삶도 이처럼 고단한데, 작은 인간과 함께 사는 삶은 얼마나 더 고단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삭은 젖을 토해내는 아이의 등을 쳐주고, 기저귀를 갈아 입히고, 재우고, 눕히고, 걸음마를 떼는 걸 함께 하고,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떼기까지 뒤에서 붙잡아주고 하는 그 모든 고된 과정을 내가 알 도리는 없다. 그게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온전히 기쁨으로만 가득 찬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그 이면에 힘들고 외롭고 고단한 시간이 있을 거란 사실을 그저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사카모토 유지 원작의 동명 일본 드라마 <마더>(2010, 니혼 TV)를 리메이크한 정서경 작가의 <마더>(2018, tvN)를 보면서, 사람들은 쉽게 신자영(고성희)을 악마로 몰아세우고 강수진(이보영)을 좋은 사람이라 말했다. 어떻게 된 엄마가 남자에 눈이 팔려서 친딸을 학대하고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릴 수가 있지? 딸을 짐이라고 생각하고 내던질 수 있지? 자영의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나는 보는 내내 자영도 조금은 안 됐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자영은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뒤, 혼자 혜나(허율)를 키우는 일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사람이었다. 고질적인 빈곤과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자영은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을 혜나로 돌렸다. 너만 없었으면 오빠도 안 떠났을 텐데. 너만 안 태어났어도 지금의 내 삶은 사뭇 달랐을 텐데.

물론, 당연하게도, 자영은 혜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아무리 제 삶이 불행하고 생의 조건이 시시각각 숨을 조여온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자기 딸을 그렇게 학대하고 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다. 자영이 잘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잘못한 사람이 과연 자영 하나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주변에서 자영과 혜나를 더 자주 들여다봐 주었다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조금씩 옆에서 덜어가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자영이 혜나에게 모든 불행의 원인을 돌리고 혜나를 학대하는 일을 막았을지도, 하다못해 혜나가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더 일찍 눈치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다면, 어느 깊은 밤 수진이 혜나를 쓰레기 봉투 속에서 구해내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편부 편모 가정의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부터도 이혼 가정에서 성장하며 편모 슬하에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니까. 그보다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밖에서 알아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정상 가정’ 안에서라고 고난과 학대가 없을라고. 남홍희(남기애)는 겉으로 보기엔 동거남과 딸과 함께 살면서 ‘정상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동거남이 자신과 어린 수진을 학대하는 걸 참아내다가 끝내 동거남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옆에서 들여다보고 도움을 주었다면, 홍희도 더 안전하고 원만한 방식으로 그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 얼핏 겉보기에 문제없어 보이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 속사정은 누군가 들여다보기 전까진 잘 모르는 거다. 마치 수진이 혜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혜나의 삶을 들여다본 뒤에야 비로소 가정폭력과 학대의 흔적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세상 모든 혜나들에게 제 인생을 걸고 지켜주겠노라 말하며 선뜻 가족이 되어준 수진이 있어준다면 좋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가정은 학대와 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무대 중 하나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야 할 집에서 가장 불안한 마음으로 트라우마를 얻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의 나쁜 양육자들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그 아이들을 다 구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고, 수진과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나온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우리가 조금씩 나누어 수진의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골목이, 마을이, 도시가, 사회가 조금씩 수진이 되어서.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