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이 밝았다. 몸이 방구석에 묶여버린 우리. 지난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 영화와 TV시리즈로부터, 그리고 배우에게서 위로를 많이 찾으려 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잘 짜인 작품 한 편을 보고 있으면 감정에 너울이 일기 마련이다. 반성의 마음에서인지 존경의 마음에서인지, 어린 배우의 호연 앞에서는 그 진폭이 더 크다. 2020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2000년대생 배우를 모아봤다.


<에놀라 홈즈>(위), <기묘한 이야기>

밀리 바비 브라운

에놀라 홈즈 2004년생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기묘한 이야기>. 그 중심에는 미스터리한 과거를 가진 엘, 일레븐이 있다. <기묘한 이야기>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밀리 바비 브라운이 지난해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찾아왔다. <에놀라 홈즈>다. 코난 도일의 원작 세계관을 빌려 새롭게 탄생시킨 소설 <에놀라 홈즈>를 영화화한 <에놀라 홈즈>는 셜록 홈즈의 동생 에놀라 홈즈에 대한 이야기다. 밀리 바비 브라운은 숙녀다움을 강요하는 빅토리아 시대에 정면 돌파하는 에놀라를 생생하게 연기했다. 9살에 연기에 입문해 경력을 착착 쌓아온 그는 극강 조연진 헨리 카빌, 샘 클라플린, 헬레나 본햄 카터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을 때에도 혼자서도 능히 극을 이끌었다.

세상에 덤벼드는 에놀라의 당찬 태도에서 브라운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이 영화의 주연뿐만 아니라 제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브라운이 원작자와 제작사에 먼저 연락해 영화화를 제안한 것. 그가 아니었다면 <에놀라 홈즈>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2019년에는 15세의 나이에 뷰티 브랜드 플로렌스 바이 밀스를 런칭한 브라운. 앞으로 또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차기작 리스트 가운데 그가 또 한 번 제작자 겸 주연으로 참여한 <더 걸스 아이브 빈>(The Girls I've Been)은 사전 제작 단계에 있으며 <기묘한 이야기> 시즌 4는 올해 공개 예정이다.


<에놀라 홈즈>

루이스 패트리지

에놀라 홈즈 2003년생

밀리 바비 브라운은 <에놀라 홈즈> 이전에도 이미 스타였다. 이 작품의 수혜자는 따로 있다. 튜크스베리 자작을 연기한 루이스 패트리지다. 사라진 엄마 찾기와 튜크스베리 실종 사건, 두 주요 에피소드를 따라 전개되는 <에놀라 홈즈>. 튜크스베리는 에놀라와 함께 극의 한가운데 있는 인물이다. 어설픈 가출인 줄로만 알았던 실종 사건은 알고 보니 신념을 지키기 위한 튜크스베리의 여정이었고, 후일 그의 한 표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결정적 한 방이 되었다.

<에놀라 홈즈> 공개 후 먼저 바이럴화 된 것은 패트리지의 곱다란 외모였지만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이들이라면 알 거다. 안정적인 연기가, 그가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는 것을. 2014년 단편 영화로 데뷔해 <패딩턴 2> <메디치: 더 매그니피센트 2>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아온 패트리지는 튜크스베리를 만나 더 빛났다. 언젠가 루카 구아다니노, 노아 바움백 감독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그. 그의 차기작 <더 로스트 걸즈>(The Lost Girls)는 후반 작업 중에 있다.


<위 아 후 위 아>(위), <그것>

잭 딜런 그레이저

위 아 후 위 아 2003년생

지난달 수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영화, 올해의 배우 등 한 해를 갈무리하는 베스트 리스트를 꼽았다. 2020년을 대표하는 시리즈로 빠지지 않고 언급된 TV시리즈가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아이 엠 러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첫 번째 TV쇼 연출작 <위 아 후 위 아>다. <위 아 후 위 아>는 이탈리아 북부 키오자에 위치한 미군 부대에서 생활하는 10대들의 이야기다. 통렬한 성장기를 겪는 이들의 솔직한 몸짓에 구아다니노 감독의 관조적 연출이 더해져, TV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장면보다 영화적인 장면들이 탄생했다.

잭 딜런 그레이저는 첫 에피소드 첫 시퀀스에서부터 좌중을 사로잡았다.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뚝뚝 끊기는 시선과 부산스러운 손발이 존 애덤스의 음악을 만나, 프레이저의 요동치는 여름, 그 시작을 알렸다. 그레이저 본인의 말을 빌리면 “프레이저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꾸준히 질문하는 인물”이다. “모든 순간 자신에게 솔직한” 프레이저. 날것의 감정에서 비롯한 프레이저의 격렬하고도 괴팍한 행동을 보고 불편을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 인물에 이입하고 그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면, 그건 잭 딜런 그레이저가 가진 흡인력 덕일 테다. 그의 얼굴을 알린 작품은 <그것> 시리즈. 천식을 앓고 있는 소년 에디가 그다. 이후 <뷰티풀 보이>에서 (공교롭게도) 티모시 샬라메의 아역을 맡았고, <샤잠!>에서는 샤잠/빌리의 친구 프레디를 연기했다. 한 해 한 해 성장해 다른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는 그레이저의 다음 캐릭터는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진다.


<위 아 후 위 아>

조던 크리스틴 시먼

위 아 후 위 아 2002년생

<위 아 후 위 아>를 통해 주목을 받은 배우가 한 명 더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케이틀린을 연기한 조던 크리스틴 시먼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면, 조던 크리스틴 시몬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에게 연기 경력이라고는 학교 연극 무대에 선 것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언제나 경력과 실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시먼의 오디션 테이프를 본 제작진은 본래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설정되어 있던 케이틀린 캐릭터를 시먼에 맞게 바꿔버렸을 만큼 그에게 매료됐다. 제작자가 어째서 구태여 시먼을 캐스팅했는지는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멍때리는 건지, 혹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은 케이틀린의 시그니처와도 같다. <위 아 후 위 아>는 케이틀린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케이틀린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뭣이 됐든 응원하던 프레이저. 머리를 몽탕 자르고 콧수염을 붙이는 케이틀린이 자신의 모습이 어떻냐고 묻자 프레이저는 “잘 모르겠어. 너 아직 너야?”라고 답한다. 프레이저의 반문은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 여자가 되고 싶든, 남자가 되고 싶든, 어떤 모습을 하고있든, 네가 네가 맞는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맞는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맞는지. 중요한 건 그거다. 시먼은 요란스럽고 특별한 성장통을 겪은 케이틀린이 되어 시청자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아임 낫 오케이>(위), <그것>

소피아 릴리스

아이 엠 낫 오케이 2002년생

<그것> 개봉 후 3년 하고도 몇달이 지난 지금. 루저 클럽 멤버들은 인기 10대 스타로 활약하고있다. 앞서 이야기한 잭 딜런 그레이저. <나이브스 아웃>과 애플TV+ 시리즈 <디펜딩 제이콥>에서 제이콥을 연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제이든 마텔. <기묘한 이야기>의 마이크로 먼저 이름을 알리기는 했지만, 핀 울프하드도 루저 클럽 멤버였다. 또 있다. <그것>의 홍일점 베벌리를 연기한 소피아 릴리스와 스탠리 역의 와이엇 올레프다. 둘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아이 엠 낫 오케이>를 통해 한 번 더 만났다.

<아이 엠 낫 오케이>의 주인공 시드니(소피아 릴리스)는 가뜩이나 불안정한 사춘기를 보내는데, 통제할 수 없는 슈퍼 파워까지 생겨버리면서 그의 삶은 더 꼬인다. 분노에 잠식된 시드니가 피칠갑을 하고 거리를 뛰는 모습이 강한 인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이 엠 낫 오케이>는 단 하나의 시즌을 끝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속편 제작이 코로나 19로 인해 안타깝게도 돌연 취소된 것이다. 2014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연기자의 꿈을 키운 소피아 릴리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몸을 긋는 소녀>다. 에이미 아담스의 닮은꼴로 종종 언급되던 그는 이 작품에서 에이미 아담스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릴리스는 찰리 플러머, 피터 딘클리지와 함께 스릴러 <더 티켓>(The Thicket)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에이단 갤러거

엄브렐러 아카데미 2003년생

<퀸스 갬빗> 공개 전까지 새 기록을 쓰고 있던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빼놓을 수 없다.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지난해 2월 넷플릭스가 데일리 톱 10 시스템을 들인 후, 넷플릭스에 올라온 콘텐츠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랜 기간 1위를 유지했다. (1위 <퀸스 갬빗> 46일, 2위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 2, 21일.)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한날한시에 태어나 억만장자 레지널드 하그리브스(칼럼 피오레)에게 입양된 7명의 초능력 형제가 종말을 막기 위해 위협에 맞서는 이야기다.

일곱 형제의 싸움이라고 쓰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 콩가루 집안과 세상을 지켜내겠다고 홀로 아등바등 용쓰는 인물은 파이브. 에이단 갤러거는 겉모습은 13세 소년이지만 내면은 58세인 시공간 초월 능력자 파이브를 그럴듯하게 구현했다. 인정 없는 레지널드 하그리브스의 아들=피실험자로 지낸 유년 시절, 갑자기 찾아온 종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45년간 고립, ‘커미션’ 소속 살인 요원 생활. 인간미라는 것을 키우려야 키울 수 없었던 파이브를 연기할만한 배우, 그것도 어린 배우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에이단 갤러거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2013년 <모던 패밀리> 시즌 4의 단역으로 데뷔했다. 넷플릭스가 <엄브렐러 아카데미> 세 번째 시즌의 제작을 확정 지은 가운데, 다음 이야기에서 파이브가 또 어떠한 방법으로 스패로우 아카데미라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할지 기대하는 바다. 한편 에이단 갤러거는 지난해 가을 소셜 미디어상에서 인종 차별 논란을 빚었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