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끝났다. 한 해가 지났음에도 '진다'나 '간다' 같은 낭만적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건, 코로나19를 중심으로 무척 고단한 한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wavve의 콘텐츠를 소개하는 2021년 첫 포스트는 진부하지만 희망적인 운치의 영화들을 골라봤다. 기자 본인이 이런 영화류를 많이 즐기지 않아, 마냥 희망적인 영화들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과 함께 힘을 얻어 2021년을 걸어 나갈 수 있길 바라며.


어거스트 러쉬

전혀 다른 음악을 하는 두 사람이 한눈에 반할 확률.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길거리를 떠돌다가 엄마 아빠와 다시 재회할 확률. <어거스트 러쉬>는 뻔뻔스럽게 우연에 기댄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현실적인 개연성을 따지는 관객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인데, 생각해보면 현실에도 '기적' 같은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어릴 적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가 지금의 직장 상사였다는 는 일화처럼. 때문에 너무 치열하게 현실적인 소재나 구성에 지친 관객이라면 <어거스트 러쉬>를 보고 잠시 뇌를 새로고침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다소 구태의연한 설명을 덧붙이면, <어거스트 러쉬>는 클래식과 록, 그리고 즉흥 연주가 영화 전반에 녹아들었다. "음악을 믿는다"는 어거스트 러쉬(프레디 하이모어)의 대사처럼 그저 이 음악들을 즐기기만 해도 흥겹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케리 러셀의 절절한 멜로 연기, 프레디 하이모어의 순박한 미소,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그립기만 한 로빈 윌리엄스의 악역 연기도 어거스트 러쉬의 장점.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그 시대는 치열했다. 온 세계가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나뉘어 내가 죽을 거면 너도 죽일 거라며 사납게 기싸움을 했다. 그런 세상에서 그저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여자였고, 가족 없는 고아였으며, 말 못 하는 농아였다. 친구가,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상에서 기계적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라이자에게 유일하게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등장한다. 문제는 그가 어인(魚人)이란 점일 뿐.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마냥 희망찬 영화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 때문에 서로를 폭로하고 비난하는 시대의 풍경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다만 엘라이자가 어인을 만나 평화로운 일상을 깨고 스스로를 위한 진정한 발걸음을 내디딜 때, 그 순간마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의 기분을 대리만족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위대한 일이듯, 누군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또한 위대한 일이다. 그것이 곧 한 사람을, 그의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월-E

지구에 홀로 남은 청소로봇 월-E는 어느 날 로봇 이브를 만난다. 하하호호 즐거운 일상을 보내던 두 로봇, 하지만 식물을 발견한 이브가 먹통이 된 채 우주선으로 끌려간다. 월-E는 우주선에 몰래 탑승해 이브를 구출하려고 한다.

픽사의 작품 중에서도 베스트로 꼽히는 <월-E>. 무성영화처럼 시작한 영화는 중반부부터 먼 미래의 인류를 등장시켜 메시지를 좀 더 다채롭게 만든다. 700년이나 우주를 떠돈 인류는 편리함에 함몰돼 비만에 게으름뱅이가 됐으나 위기의 순간에는 마침내 일어날 줄 아는 존재로 그려진다. 외형이 우스꽝스러운 탓에 진지한 교훈처럼 다가오지 않으나 생각해보라, 이런 점이 SF 장르에서 그리는 인류의 장점이다. 불가능함에도 맞서는 의지, 상대에게 진정으로 몰입할 줄 아는 공감. <월-E>의 먼 미래 인류가 다시 일어섰듯, 우리 또한 어떤 역경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강말금). 성실하게 살았는데, 어떤 사고로 일이 끊긴다. 형편 따라 집도 옮기고, 일도 영화가 아닌 가정부를 자처한다. 자신을 아껴주는 배우 소피(윤승아), 소피의 프랑스어 선생님 김영(배유람), 갑자기 불쑥 나오는 '장국영'(김영민)까지. 좋은 사람들은 많지만 점점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할 줄 아는 거는 프로듀서 일밖에 없는데, 이걸 계속해야 하나 싶어진다.

하는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모든 직장인들에게 만고의 문제일 것이다. 2020년은 심지어 하고 싶은 일은커녕 (찬실이처럼) 하는 일조차 끊긴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막막한 현실에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담담한 위로와 소소한 웃음을 준다. 이 영화는 결코 답을 주진 않는다. 어떻게 하라고 지침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고민하고, 생각하고, 때로는 주춤거리다 가끔은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찬실을 그릴 뿐이다. 찬실을 보며 웃다가 어느새 그의 고민이 내 것이 될 때, 거창하진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희망을 얻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곰돌이 푸

가상의 캐릭터인데 아주 오랜 친구 같다. 곰돌이 푸는 세상의 빛을 처음 본지 9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아마도 곰돌이 푸와 친구들을 언제 누가 보든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 아닐까. 2011년에 나온 극장판 <곰돌이 푸>도 마찬가지. 꿀이 고파서 꿀에 대한 환상을 보는 푸의 모습도 귀엽고 그의 곁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한껏 자랑하는 친구들도 귀엽기 그지없다. 영화를 보든, 드라마를 보든, 무엇을 하든 지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 시간만 딱 투자해보자. 이 영화를 볼 때의 온기가 마음의 피로를 잠시나마 풀어주고 내일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