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랜드>는 1월 14일(목) 올레 TV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대로 놓치기 아쉬운 영화들을 한 주에 한 편씩 소개합니다.


절망의 문턱에 놓인 형제의 처절한 살아내기

여기 두 형제가 있다. 스탠(찰리 허냄)과 라이언(잭 오코넬)은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오롯이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처절하고 퍽퍽하다. 출입 금지라는 노란 딱지가 붙여진 집에서 몰래몰래 몸을 뉘는 두 사람. 그들이 유일하게 믿는 구석은 동생 라이언이 가진 주먹 솜씨다. 라이언은 싸움질과는 거리가 먼 소심한 인간이지만 굶지 않기 위해선 링 위에 발바닥을 붙인다. 스탠은 그런 동생의 재능을 채찍질하며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한다. 어느 날 스탠이 범죄 조직 보스(조너선 메이저스)에게 돈을 갚지 못하자, 라이언과 스탠은 어쩔 수 없이 일확천금이 걸려있는 토너먼트 복싱대회 '정글랜드'을 향해 전국을 횡단하는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에겐 예기치 못한 한 명의 동반자, 스카이(제시카 바든)가 함께 하게 된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동반자, 그 속에서 새롭게 밀려드는 감정들. 스카이가 나타난 이후로 형제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몸이 아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서정적인 복싱 영화

<정글랜드>는 기존의 복싱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정글랜드>의 포스터를 본 이들이라면 자연스레 <록키> 혹은 <주먹이 운다>와 같은 주먹 액션 영화를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정글랜드>는 서정적인 측면이 도드라진다. 어쩌면 액션 영화보다는 성장 영화, 로드 무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영화는 화려한 액션신이나 그럴듯해 보이는 무언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세 사람의 처절함을 통해 더욱 진한 피비린내를 풍긴다. 이들에게 복싱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유일한 희망일뿐이니까. 즉,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을 보여주기보단 정글랜드라는 경기를 위해 달려가는 과정 속 개개인의 내면을 농밀하게 그려내 내러티브의 입체감을 더했다.

살기 위해서 자신들이 키우던 강아지를 팔아 버리는 모습을 통해 돈을 향한 스탠의 처절한 욕망을 그려내고, “복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가장 활짝 웃는 라이언을 통해 싸움판을 원치 않았던 라이언의 진실된 내면을 보여준다. 또 관객들의 마음을 가장 세게 쥐고 흔드는 인물은 단연 스카이다.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돈을 구걸하기 위해 방문한 스카이의 집에서 그녀는 부모로부터 냉대를 받지만,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자신의 방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자책감에 빠져드는 등 그녀는 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그려낸다. 즉, 영화는 아웃사이더라 명명되는 인물들의 로드 트립을 통해 왜 이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시키며, 이들의 서사가 영화 속에 충분히 스며들게 한다. 몇몇의 액션 영화들이 답습하는 거칠고 단순한 내러티브 방식을 고수하기보단 스카이, 라이언, 스탠이라는 세 인물의 작은 순간순간을 포착한, 서정적인 복싱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복싱이라는 큰 틀 속에 담아낸 인물들의 요동치는 감정과 섬세한 내러티브. <정글랜드>에 관객들이 마음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소다.


찰리 허냄, 잭 오코넬, 제시카 바든… 꼭 봐야 할 배우들의 앙상블

출연진의 이름만으로도 재생 버튼을 누를 가치가 충분한 작품들이 있다. <정글랜드> 역시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믿보’ 영국 배우들의 만남이 시선을 끈다. 무엇보다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조명하면서도 세 명의 영국 배우들을 캐스팅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 영화는 세 인물들의 변화하는 감정선이 중요한 영화이니만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데, <정글랜드>에서 만난 세 배우는 놀라우리만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왼쪽부터) <젠틀맨> <정글랜드>

“사랑해,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며 동생에게 사랑을 표하는 스탠은 누구보다 동생을 아끼면서도, 동생의 뛰어난 싸움 실력을 통해 재빨리 제 지위를 역전시키고 싶은 인물이다. 라이언의 코치이자, 스파링 파트너이자, 마사지사인 그는 돈이 없어도 좋은 호텔을 예약하는 허세에 찌든 말투와 표정을 하면서도 돈이 필요할 땐 누구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지닌 다면성을 표현한다. 스탠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 찰리 허냄이 연기했다. 이미 <칠드런 오브 맨> <썬즈 오브 아나키> <킹 아서: 제왕의 검> <젠틀맨> 등 굵직한 작품들을 통해 제 스타성과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국내 관객들에겐 ‘섹시가이’로 통하는 매력적인 배우. 차분하면서도 거친 연기가 장기인 만큼 <정글랜드>에서도 그는 스탠이란 인물이 지닌 복잡성을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왼쪽부터) <언브로큰>, <정글랜드>

지금까진 형 스탠에 의해서 흔들리는 삶을 살았지만, 스카이의 등장 이후론 제 안에 숨겨진 평범한 욕망을 깨닫는 복서, 라이언 역은 배우 잭 오코넬이 맡았다. 복서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속으론 평범한 동네 세탁소를 운영하는 꿈을 지닌 누구보다 연약하고 방황하는 인물. 잭 오코넬은 이러한 흔들림을 트레이드마크인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눈빛으로 완성했다. <스킨스> <언브로큰> <300: 제국의 부활>에서 보여줬던 호연 이상으로, 그는 <정글랜드>를 통해 자신이 감정 연기에 얼마나 능한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덧, 어릴 적부터 복싱을 해왔다는 그는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복싱 장면과 맨손 싸움 연기를 실제 권투선수처럼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실지로 오랜 시간 다져왔다는 그의 복싱 실력을 눈여겨보며 영화 속 액션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시기를.

(왼쪽부터) <빌어먹을 세상따위> <정글랜드>

영화는 스카이의 등장 이후로 급물살을 탄다. 타자에 의해 “과소평가 받는” 스카이와 라이언이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는 순간부터 형제의 하나 된 삶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보호받을 곳 없는 소녀, 스카이의 뾰족한 가시와 유약한 내면을 동시에 표현해낸 배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빌어먹을 세상따위>의 앨리사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제시카 바든. 이미 <빌어먹을 세상따위>를 통해 그가 보여준 것처럼, 제시카 바든은 차가우면서도 여린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특화된 배우다. 모든 캐릭터마다 제 옷을 입혀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제시카 바든의 연기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정글랜드>를 통해 이 배우의 당찬 연기를 꼭 지켜보시라.


몰입도를 배가하는 영화 속 음악

<정글랜드>는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하다. 너무 늦게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제목인 <정글랜드>는 미국 노동자 계급의 고난과 좌절을 노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만든 노래 ‘정글랜드’로부터 차용한 제목이다. 아쉽게도 ‘정글랜드’는 영화 속에 삽입되지 않았지만,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드림 베이비 드림 ’(Dream Baby Dream)이 영화의 엔딩 곡으로 흘러나오며 마지막까지 몰입도를 더한다. 사실 <정글랜드>의 O.S.T.는 오프닝부터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는데, 시합을 위해 뛰어가는 형제의 뒷모습위로 흐르는 로스탐(Rostam)의 ‘인 어 리버’(In a River)는 시작부터 이 영화에 온전히 빠져들게 한다. 영화 중간중간 노래의 제목을 찾고 싶게 만들 만큼 곳곳에 흐르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선율에 집중해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더해 <정글랜드>는 연출적인 완성도도 놓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학교 신. 지낼 곳이 없어 숨어 들어간 학교 강당에서 춤을 추는 스카이와 라이언을 어둠 속에서 풀숏으로 잡아낸 장면은, 두 사람의 공기를 온전히 담아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둘 사이의 관계에 미묘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외에도 마치 관객들이 세 사람의 로드 트립을 관전하는 듯한 풀숏 장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며 영화는 미국이 가진 어둡고 눅눅한 이면을 잘 담아냈다. 맥스 윙클러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로 호평을 받은 <정글랜드>는 2019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