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벌써 보름 가까이 흘렀다. 새로운 도약을 향해 차곡차곡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은 물론 여전히 2020년 13월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을 위해, 음악을 길잡이 삼아 벤 스틸러 감독-주연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을 곱씹어본다.

Maneater

DARYL HALL & JOHN OATES

월터(벤 스틸러)는 저명한 사진 잡지 <라이프>의 네거티브 필름 담당자다. 마음에 둔 동료 직원 셰릴(크리스틴 위그)에게 데이트 사이트에서 호감을 보이는 것조차 망설이고 어김 없이 공상에 빠져 곤란해 한 어느 날 아침, 회사가 팔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구조조정 담당자 테드(애덤 스콧)를 마주한다. 머리며 수염이며 딱 봐도 재수 없는 놈이 분명한 테드는 월터에게 무슨 일을 하냐 묻고 대답까지 듣고는 엘리베이터에서 흐르고 있는 노래를 듣다가 놓쳤다고 말한다. 1970~80년대 팝 신의 가장 찬란한 듀오 데릴 홀(Daryl Hall), 존 오츠(John Oates)의 ‘Maneater’다. 테드가 <라이프> 직원을 하대한다 걸 드러내는 월터의 공상 신이긴 하지만, 찰떡 같은 멜로디와 리듬의 향연과도 같은 이 노래가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다면 거기에 정신이 팔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로 좋은 노래인 건 부정하기 어렵다. 1982년 가을에 발표된 ‘Maneater’는 그해 연말 시즌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해 4주동안 선두를 지키면서 홀 앤 오츠의 최고 히트작으로 자리매김 했다. 월터는 테드에게 그따위 수염은 덤블도어한테나 어울릴 거라고 비웃는 공상에 빠졌다가 깨어나고, 테드는 “mind over matter~”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자리를 뜬다.

Ted vs Walter

THEODORE SHAPIRO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묘미 중 하나, 갖가지 장르의 쾌감을 맛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월터는 틈만 나면 자기만의 상상에 빠지기 일쑤고, 일상을 벗어나 사진가 숀 오코넬(숀 펜)을 찾으러 세상을 누비는 사이 갖가지 상황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감독’ 벤 스틸러의 전작 <트로픽 썬더>(2008)의 음악을 맡으며 스틸러와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는 시어도어 샤피로(Theodore Shapiro)는 때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면들을 끌어안는 스펙트럼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만들었다. 이를테면, 월터가 셰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신의 ‘Walter Sees Cheryl ’과 쭉쭉이 인형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월터와 테드가 갑자기 시가지 추격전을 벌이는 대목의 ‘Ted vs Walter’는 전혀 딴판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 그리고 잘게 쪼개진 일렉트로니카 비트 가 뒤섞인 ‘Ted vs Walter’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더 어울릴 법한 음악이다. 월터가 엄마와 동생과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셰릴과 연인이 되는 상상을 하고, 아이슬란드로 가는 바다에서 상어와 싸우고, 숀을 찾아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 서사의 순간순간에 샤피로의 변화무쌍한 스코어가 함께 한다.

Wake Up

ARCADE FIRE

숀 오코너의 25번 사진을 내놓으라는 테드의 갈굼에 시달리던 월터는 사진 속 숀이 자기한테 오라고 손짓하는 환영을 보고서 그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린란드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월터가 회사를 나서는 순간부터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Wake Up’이 나오기 시작한다. 둔중한 기타 소리에 행진곡에 걸맞는 타악기에 더해지면, 사무실을 나선 월터는 곧장 공항으로 가 그린란드행 티켓을 끊는다. 환호하는 듯한 합창 소리까지 붙어 제 한계를 깨고 나가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응원하는 것 같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금 합창 소리가 터져 나오면 월터의 눈 앞엔 광활하게 펼쳐진 그린란드의 전경이 펼쳐지는 타이밍까지 고려한 배치다. 캐나다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데뷔 앨범 <Funeral>에 수록된 ‘Wake Up’은 유수의 음악 매체가 2000년대 발표된 최고의 노래 중 하나로 선정됐고, 듣기만 해도 나도 몰랐던 잠재력이 샘솟는 것 같은 특유의 사운드에 힘입어 갖가지 스포츠 행사와 공익광고에 사용된 바 있다.

Space Oddity

DAVID BOWIE

테드는 사무실에서도 멍 때리고 있는 월터를 ‘톰 소령’(Major Tom)이라 부른다. 그가 처음 지어낸 말은 아니고, 데이빗 보위(David Bowie)가 1969년 여름에 발표한 명곡 ‘Space Oddity’의 주인공에게서 따온 것이다. ‘Space Oddity’에선 “Ground Control to Major Tom”이라는 노랫말에 여럿 반복된다. 그린란드에서 숀을 쫓아 헬기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 조종사가 술에 취한 걸 보고 헬기에 타지 않겠다고 한 월터는 문득 톰 소령이 나오는 그 곡이 “미지를 개척하는 용기”에 대한 노래라고 말해줬던 셰릴이 갑자기 펍에 나타나 ‘Space Oddity’를 불러주는 상상에 빠진다.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셰릴을 따라 바깥으로 나와, 우주선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걸 표현한 잠깐의 연주에 이어 “여기는 지상관제소, 톰 소령 응답하라”라는 보위의 목소리가 터지면, 월터가 헬리콥터로 뛰어오른다. 서늘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보위의 힘찬 보컬이 바람 부는 부둣가에 서서 월터를 향해 웃는 셰릴과 하늘 위에 떠 있는 월터를 이어준다. ‘Space Oddity’를 통해 톰 소령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던 보위는 1980년의 ‘Ashes to Ashes’, 1995년의 ‘Hallo Spaceboy’,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의 리드 싱글 ‘Blackstar’까지 꾸준히 톰 소령에 해당하는 인물을 노래에 담았다.

Far Away

JUNIP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영영 입에 붙지 않을 것 같은 화산 ‘에이야파들라이외퀴들’에 가는 길은 여전히 묘연한 상태. 자전거를 버리고 맨몸으로 달리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들에게 쭉쭉이 장난감을 주고 스케이트보드를 얻은 월터는 어릴 적 보드 타던 실력을 발휘한다. 보드를 타고 재빠르게 이동하니 여정 자체가 버겁기만 했던 때보다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스웨덴의 포크 밴드 주닙(Junip)의 노래 ‘Far Away’가 한결 가벼워진 월터의 여정에 함께 한다.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은 꽤나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호세 곤잘레스(Jose Gonzales)의 기타와 보컬은 힘을 빼고 여유롭기만 한 밸런스가 아이슬란드의 자연을 질주하는 월터에게 속도감과 여유를 동시에 부여한다. 주닙의 멤버 호세 곤잘레스는 시어도어 샤피로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사운드트랙에 보컬과 기타 연주로 참여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Far Away’는 뚝 끊기고 음산한 스코어 ‘Eyjafjallajökull’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 한적한 마을에 곧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예감하게 된다. 한편, 주닙의 또 다른 노래 ‘Don't Let It Pass’는 영화 후반부 월터가 드디어 숀을 만나 25번 사진에 대한 행방을 듣고, 히말라야의 사내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는 신에 사용됐다.

Lake Michigan

ROGUE WAVE

빈손으로 뉴욕에 돌아온 월터가 셰릴이 전남편과 재결합 했다고 오해까지 해서 실의에 빠지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숀을 찾아 히말라야로 떠나는 순간,<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한단계 더 도약한다. 오클랜드 출신의 밴드 로그 웨이브(Rogue Wave)의 ‘Lake Michigan’이 함께 한다. 찰랑거리는 기타 소리와 기운센 박수 소리가 문을 열고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는 가운데, 이제는 낯선 풍경에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는 월터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만난 ‘작은 거인’ 두 명을 고용해, 이전보다 훨씬 험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여주는 분위기는 한결 가볍기만 하다. 산의 축복을 받는 의식을 치르고, 워로드에게 엄마가 만든 오렌지 케이크를 뇌물로 바치고, 비를 맞으며 풀을 뜯어먹는 과정, 월터의 곁엔 두 친구가 있다. 그들이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때가 되면 노래도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월터는 다시 혼자가 된다.

I'm Right Here

THEODORE SHAPIRO & JOSÉ GONZÁLEZ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결말은 예상 그대로다. <라이프> 마지막 호의 표지가 무슨 사진인지 확인하는 것. 퇴직금을 받은 날 월터는 회사에서 셰릴을 만난다. 셰릴이 전남편과 별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안 월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동생의 연극을 같이 보러가자고 말한다. 월터와 셰릴이 나란히 걷고 ‘I'm Right Here’가 흐르기 시작한다. 호세 곤잘레스의 나직한 허밍 위로 시어도어 샤피로가 만든 피아노 선율이 더해지면, 두 사람의 사랑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가판대에서 <라이프> 마지막 호를 본다. 회사 근처에 걸터앉아 필름을 확인하고 있는 월터의 모습. 하지만 월터는 그 기쁨에 오랫동안 겨워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월터의 곁에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셰릴이 있으니까. 월터가 셰릴의 손을 잡으면, 음악도 천천히 잦아든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