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피트 닥터 감독

코로나19의 3차 확산세로 인해 국내에선 지각 개봉하는 픽사의 2020년 신작 <소울>은 피트 닥터가 오랜만에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이세계 몬스터들과 인간 아기 부의 좌충우돌 소동기(<몬스터 주식회사>)를 시작으로, 백년해로 한 아내를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집에 풍선을 매달아 여행을 떠나는 노인의 여정(<업!>)에 이어, 감정의 의인화 및 대상화를 통해 일상적인 십대 소녀의 삶 이면에 꿈틀대는 스펙터클한 모험담(<인사이드 아웃>)을 직조했던 피트 닥터는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를 극대화로 활용해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경이로운 상상력과 진득한 감동을 안기며 존 라세티의 뒤를 이어 픽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북미에서 픽사 최초로 극장 개봉을 못한 <소울>

이번 <소울>에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죽음에 직면한 재즈 뮤지션 조 가드너와 생의 처음을 앞둔 영혼 ‘22’의 버디 활극을 통해 삶에 대한 성찰과 일상의 소중함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건 의미심장하게 코로나 시대에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본질로 다가온다. 피트 닥터와 픽사의 기발한 상상력과 짜릿한 어트랙션 같은 어드벤처, 가슴을 울리는 감동도 여전하다. 피카소나 바스키아를 떠올릴 법한 추상적인 이미지와 진짜 같은 디테일한 뉴욕의 일상성을 동시에 캐치해 배치한 기술력 또한 환상적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픽사답게 최초로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 픽사 최초로 북미에서 극장 개봉을 못 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고 말았다.

애티커스 로스와 트렌트 레즈너

그럼에도 제73회 칸영화제 라인업에 포함되는 기염을 토했으며, 로마필름페스티벌과 부산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만큼은 인정받았다. 그리고 작년 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디즈니+에서 공개되며 <해밀턴>과 비슷한 시기 공개된 <원더 우먼 1984>에 이어 2020년 가장 많이 시청한 작품으로 집계돼 어느 정도 상업적인 해갈도 맛봤다. 언제나 놀라움을 선사하는 픽사답게 진정한 놀라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소울>의 음악을 전작들을 담당하고 디즈니가 사랑해 마지않는 마이클 지아치노가 아닌,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맞다. 세기말 인더스트리얼 록계의 신화였던 ‘나인 인치 네일스’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맡았다는 경청동지(!) 할만한 소식이다.


<소울>

나인 인치 네일스의 디즈니 나들이

음악을 맡게 된 그들 역시 인터뷰에서 평생에 디즈니 음악을 할지 몰랐다고 털어놨을 정도니 본인들도 인증한 의외의 캐스팅인 셈이다. 2020년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놀라운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시민 케인>의 탄생기를 다룬 데이빗 핀처의 필생의 야심작 <맹크>의 음악을 맡아 1940년 할리우드가 배경인 이 영화를 위해 그간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버리고 언플러그드 스코어에 처음 도전하기도 했다. 음울하고 과격하며 실험적인 소리들로 널리 알려진 나인 인치 네일스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도전하고, 클래시컬하고 재즈가 주를 이루는 고전적인 흑백 영화음악을 맡았다는 걸 전성기 때 언급했다면 아마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놀라운 변신들로 그들은 현재 가장 강력한 시상식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소울>

첫 영화음악이었던 <소셜 네트워크>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들을 석권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를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치부한 시선도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는 틈틈이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나를 찾아줘>, <패트리어트 데이>, <미드 90> 등 안정적인 필모를 쌓아왔고, 넷플릭스에서 의외로 빅히트한 <버드 박스>의 성공과 2019년 최고의 명품 드라마 중 하나로 손꼽히는 HBO의 <왓치맨>으로 TV계 오스카라 불리는 에미상을 거머쥐며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정상급 영화음악가로 자리를 굳혔다. 픽사의 시그니처 같은 랜디 뉴먼과 오스카 음악상을 거머쥐게 만든 마이클 지아치노를 경험한 피트 닥터는 그들과 전혀 공통점이 없던 나인 인치 네일스에게 어떤 점이 끌렸던 걸까.


<소울>

자유롭고 평화로운 영혼들을 위한 음악

그건 <소울>의 주된 배경과 테마가 현실이 아닌, 영혼과 사후 혹은 전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크다. 공감각적인 심상을 자극하기 위해 보편적이고도 익숙한 심포닉 스코어 대신, 정반대의 엠비언트와 일렉트릭 사운드로 조합된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색채들로 천상의 분위기를 직조해냈다. 물리적인 법칙들과 공간을 무시하고 영혼 특유의 자유로움과 변화무쌍한 움직임 그리고 평화로운 공간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밝은 80년대 일렉트로니카나 뉴에이지를 연상케 만드는 소리들로 채웠다.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특징인 음울하고 어둡던 인더스트리얼 스타일과 거리가 멀지만, 희망적인 레트로 8비트 게임 선율을 떠오르게 만드는 활기찬 큐들은 영롱하게 빛나고 적절한 위트와 조화를 이루며 감동의 전율마저 안긴다.

<소울>

이런 분위기는 픽사의 다른 애니에서도 살짝 감지된 바 있다. 토머스 뉴먼이 음악을 담당한 <월-E>에서 인간이 떠나버린 황폐화된 지구를 묘사하며 미니멀한 사운드에 일렉 톤을 곁들어 단조로운 외로움과 기계만이 남은 세상을 구현한 바 있는데, <소울>은 한발 더 나아가 스코어를 넘어 짧지만 체험적인 사운드디자인을 통해 갈 길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로하고, 열정과 꿈을 가진 이들을 격려해준다. 다루고 있는 대상이나 소재 자체가 충분히 감정적이라 자극적이고 격정적으로 흐르지 않는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쿨함이 오히려 관조적이고 성찰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중간중간 조 가드너와 22를 엄습해오는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음습하고도 위태로운 소리들이 스릴러에서 다져진 노련한 손길과 만나 영화의 적절한 완급을 조절한다.


<소울>

현실 속의 재즈를 담당한 존 바티스트

그리고 또 한 명의 공로자, 존 바티스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재즈 뮤지션을 메인으로 다루고 있기에 <소울>에선 재즈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기용된 뮤지션이 바로 존 바티스트다. 그는 현실에서 조 가드너가 연주하는 재즈의 편곡과 선곡, 그리고 (비록 음악 크레딧을 레즈너와 로스와 함께 공유하진 못했지만) 재즈 선율로 된 뉴욕 시퀀스들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맡아 책임졌다. 나인 인치 네일스가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상징한다면 바티스트가 맡은 음악들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소리들을 표현한다. 이 대비야말로 <소울> 사운드트랙의 힘이자 백미이고, 탁월한 조율과 조화의 미덕을 자랑한다. 자칫 통일감이 무너질 수도 있는 극단적인 공존이지만, 세 뮤지션들의 분업은 놀랄 만치 노련하게 이루어졌다.

존 바티스트

다만 음악 영화가 아닌 만큼 재즈 선율이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도 조화를 깨트릴 수 있어 선곡과 편곡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는데, 이는 바티스트의 다양한 경험이 빛을 발휘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 밴드에서 경험을 쌓고, 17살이란 어린 나이에 쇼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앨범을 내고, 스티브 원더나 윌리 넬슨, 레니 크라비츠, 에드 시런 등 아티스트들과 협연을 하며 “레이트 쇼”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해온 덕택에 조 가드너의 꿈과 열정의 무대를 만들어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그의 여유롭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초기 픽사의 애니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랜디 뉴먼의 여유와 관록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만 너무나 짧게 끊어지는 곡들이고 즉흥성만 포착한 탓에 재즈의 온전한 멋과 풍류를 뜯고 씹고 맛볼 수 없다는 건 조금 안타깝다.


<소울> 한국 주제가를 부른 이적

각국마다 다른 <소울>의 오리지널 엔딩 주제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며 주제가가 흘러나오는데, 영미권에선 존 바티스트가 부른 "It's All Right"이 삽입돼 있다. 원곡은 커티스 메이필드와 더 임프레션스가 1963년에 불러 빌보드 핫100 4위까지 올랐던 곡으로, 음악이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사회적인 힘과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티스트의 믿음과 희망이 담겨 일상의 아름다움과 긍정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국내 버전에선 이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은 이적이 새롭게 만든 “쉼표”라는 곡이 흘러나온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윤석철과 함께 작업한 감미로운 일상예찬론이다. 일본에서는 JUJU가 부른 “奇跡を望むなら...”가, 스페인에서는 파블로 로페즈가 부른 “Escucha la vida”가 오리지널 엔딩 곡으로 삽입돼 각국마다 색다른 <소울>의 대미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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