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있는 뮤직비디오, CF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30살의 데이빗 핀처는 1992년 <에이리언 3>로 할리우드 신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듯했다. 20세기 폭스사의 대대적인 간섭으로 영화의 색이 흐려지고 흥행에도 실패한 <에이리언 3>. 핀처는 3년 후 진짜 자기 영화를 들고 세상에 나온다. <세븐>이다. 그는 단숨에 평단을 매료했다. 지금 바로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데이빗 핀처 영화 5편을,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과 함께 소개한다.


조디악

Zodiac, 2007

실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한 연쇄살인범 조디악 킬러 사건을 담은 <조디악>. 핀처는 영화화를 위해 법의학자를 고용했고, 비공개 법정 증거를 분석했고, 사건 관계자 가족을 인터뷰하는 등 수년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했다. 살인 현장의 잔혹성을 조명하는 대신 사건에 사로잡힌 이들, 형사 데이빗(마크 러팔로), 기자 폴(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리고 만평가 로버트(제이크 질렌할)의 수사가 맞는 승리와 좌절을 긴 호흡으로, 밋밋함의 미학으로 풀어냈다. <조디악>은 최고의 범죄 영화로 꼽힐 뿐만 아니라, <세븐>과 함께 최고의 핀처 영화로 불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이빗이 자작극 소동에 연루되고 폴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가는 동안에도 로버트는 끈질기게 조디악 킬러를 쫓는다. 어쩌면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의 면에서 세 인물 중 가장 뒤에 선 인물인데도. 핀처는 로버트를 통해 집착을 탐구했다. 그는 어느 비 오는 날 밤 로버트를 용의자의 집에 데려다 놨다. 무방비의 로버트가 밥(찰스 플레셔)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갈 때, 우리는 <조디악>의 그 어떤 장면보다도 섬뜩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밥이 본인이 범인이라고 시인하기라도 하는 듯한 대사와, 지하실 공기를 타고 서늘하게 울리는 소리, 얼굴에 깊게 그을린 그림자. 이 음침한 장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맥박이 빨라진다. 속도감보다는 리얼리즘을 택한 이 영화를 그저 지루하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리한 심리묘사는 핀처가 가장 잘하는 것이니까.


파이트 클럽

Fight Club, 1999

1999년 개봉 당시 <파이트 클럽>은 평단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주된 이유는 폭력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영화의 일부로 활용된 폭력성과 그것을 둘러싼 비판 때문에 그저 좋지 않은 영화로 평가되기에 <파이트 클럽>은 잘 짜인 영화였기에. 다행히 영화는 부가판권 시장에서 재평가를 받았다. <파이트 클럽>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핀처의 테크닉이 돋보인 작품임이 틀림없다. 그의 전매특허 VFX 트래킹 숏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비주얼만 있는 게 아니다. 불면증과 무기력증에 허덕여 암 환자 격려 모임에 참여하며 낮과 밤이 바로 잡힌 생활을 겨우 유지하던 나레이터(에드워드 노튼)는, 타일러(브래드 피트)를 만나 ‘파이트 클럽’을 만든다. 영화는 소비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데에도 나름의 통찰력을 보인다. 단어를 고르고 보니 영화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전혀 아니다. <파이트 클럽>은 두고두고 볼 재미가 있는 영화다.

나레이터가 상사 리처드(자크 그레니어)의 방에서 원맨쇼를 벌이는 장면은, 새삼 ‘아,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나레이터였지?’ 깨닫게 한다. 화려한 외양과 거침없는 태도의 타일러는 줄곧 나레이터와 우리를 압도해왔다. 그래서 나레이터보다 타일러에 더 매료되어 극을 따라가던 이들이 분명 있었다. 온몸으로 사무실을 깨부수고 피범벅이 되어서 회사를 나서는 나레이터는, 뭐가 대수냐는 듯 휘파람을 불며 쳐다보는 이들에게 가볍고 쿨한 작별 인사를 날린다. 조립식 생활, 체제로부터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퇴장. 나레이터의 존재와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력을 각인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8

뒤에 언급할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나를 찾아줘>가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압축했다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 버튼>)는 늘리는 데 힘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은 피츠제럴드의 단편에서 모티브와 제목을 빌렸다. 소설은 <포레스트 검프> 시나리오 작가 에릭 로스를 만나 재탄생했다. 원작에서는 생략된 혹은 없던 벤자민(브래드 피트)과 그의 아내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애틋한 로맨스는 166분의 영화에서 되살아났다. 영화는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는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다. <벤자민 버튼> 이전까지의 핀처 작품을 생각해보자. <세븐> <더 게임> <패닉 룸> <조디악>. 뭐, 백번 양보해서 <파이트 클럽>을 멜로라고 하더라도 이외의 작품에서 로맨스는 찾아볼 수 없다. 핀처는 꾸준히 묵시록적인 스릴러에 장기를 보여왔다. 그런 그가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 그것도 판타지 로맨스를. 20대부터 80대 사이의 두 캐릭터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은 이 영화를 완성한다.

벤자민이 49살, 데이지가 43살이 되던 해. 비로소 둘의 나이가 비슷해져,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기억에 담던 장면도 빼놓을 수 없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데이지의 교통사고를 그린 장면. 코트를 두고 나선 여자, 알람을 깜빡한 남자, 실연에 벙찐 부티크 점원, 카페에 들른 택시 기사, 끊어진 신발끈. 어느 한순간만 달랐어도 데이지가 택시에 치이지 않았으리라는 것. 순간의 조각이 쌓아 올린 나비 효과를 이토록 세련되게 구성할 수 있을까.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2011

스웨덴 베스트셀러 <밀레니엄> 시리즈가 데이빗 핀처의 손을 거쳐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이 되었다. 부패 재벌 폭로 기사로 소송에 시달리던 기자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은 어느 날 또 다른 재벌 가문 방예르의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서 40년 전 사라진 손녀 하리에트 사건을 조사해줄 것을 의뢰받는다. 미카엘은 범상치 않은 외모의 조수, 천재 해커 리스베트(루니 마라)와 함께 수사를 하게 된다. 2011년 개봉 당시 <밀레니엄>은 이미 3부작으로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한 스웨덴판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는데. 루니 마라의 다소 파격적인 비주얼과 핀처의 뛰어난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스토리와 예상 가능한 미스터리로 아쉽다는 평을 한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매혹적인 캐릭터의 관계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밀레니엄>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강한 인상을 주는 장면은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등장한다. 팀 밀러와 핀처가 만든 타이틀 시퀀스는 우리가 영화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함축한다. 검은 기름에 흠뻑 젖은 용, 벌, 꽃, 사람의 기괴한 이미지는, 알고 보면 타이틀이 끝나면 맞이할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다. 트렌트 레즈너와 캐런 오가 커버한 ‘The Immigrant Song’은 빠르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252개의 숏을 감싸며 긴장감을 더한다.


나를 찾아줘

Gone Girl, 2014

이상적인 부부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 둘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 아내 에이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닉의 결백에 의심없이 동의하다가, 닉이 범인이라고 말하는 단서에 그를 수상히 여기다가, 중반에 다다라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류의 서스펜스가 개입하면, 지난 65분간 이래저래 추론하며 쌓아 온 옳고 그름에 대한 내 판단은 한순간에 뒤집힌다. <나를 찾아줘>는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여느 부부 같은 부부가 된 둘과, 사건을 소비하는 미디어의 속물적 속성을 사늘하게 비추는 블랙 코미디다.

피칠갑의 잔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첫 충격은 더 강렬하다. 짧은 블랙아웃에 에이미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가 “난 죽은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라고 말하는 순간, 화면이 전환되고 에이미는 그가 사용한 트릭을 설명한다. 놀란 마음 가다듬으며 자초지종을 따라가다 보면 일명 ‘쿨 걸(Cool Girl) 독백’으로 불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쿨한 여자. 남자들은 ‘쿨’이란 단어를 칭찬으로 쓰지. ‘그 여자 쿨해.’ 쿨한 여자는 섹시해. 쿨한 여자는 잘 맞춰주고, 쿨한 여자는 재밌어. 쿨한 여자는 남자한테 화도 안 내. 스타일도 남자 취향에 맞춰. 저 여자의 남자는 변태 만화를 좋아하겠군. 닉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쿨한 여잘 원했고, 난 그이한테 맞춰주려고 애썼어.(후략)” 쿨한 여자에 대한 에이미의 사색. 남자가 무얼 원하는지 상상하고 그 이미지를 흉내 냄으로써 만들어진 쿨한 여자는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역할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 소설의 대사를 적절히 영화화한 이 장면은 <나를 찾아줘>가 남긴 베스트 장면 중 하나다. 대사는 파이크의 냉담한 톤을 만나고, ‘쿨한 여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된 에이미의 모습에 겹쳐져 더 빛난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