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노년은 날이 끝나갈 때 타오르며 포효해야 하니/빛이 사그라드는 것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MBC 드라마 〈더블유(W)〉(2016)를 다룰 때, 나는 작가의 변덕에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아온 강철(이종석)의 좌절보다는 자신의 피조물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어 고통받던 작가 오성무(김의성)의 좌절에 더 눈이 갔다. 사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올림픽 사격 은메달리스트, 청년 재벌’ 강철보다는 늘 마감에 시달리는 인접 업종 종사자 오성무의 좌절이 조금은 더 공감이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철에게 감정이입을 못 할 일도 아니다. 가끔씩 세상에 나에게 질 나쁜 농담을 건네는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좀처럼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목표했던 바가 손안에 잡힐 듯 가까이 왔다가 장난치듯 멀어져갈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행 위에 불행이 겹겹이 쌓일 때, 그런 순간이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번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한 적이 있으리라.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늘에 섭리라는 게 있다면 나한테 이렇게까지 굴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무류 작가의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2018)을 원작으로 한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2019)의 주인공 은단오(김혜윤) 또한, 창조주의 섭리가 왜 자신에게만 가혹한지 답답한 사람이다. 공부를 잘하고 행실이 바르며 외모도 아름다운 부잣집 딸 단오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심장질환을 앓았고, 집에서 정해준 약혼자 백경(이재욱)은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게 그렇게까지 서럽지는 않았다. 최근엔 가끔씩 미래가 보이는 순간도 생겨서, 역시 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가 싶었으니까. 자신이 인간 세계라고 알고 있던 곳이 사실은 순정만화 〈비밀〉 안이었고, 자신은 〈비밀〉의 작가가 그린 등장인물, 그것도 주연이 아니라 ‘그 외 인물들’에 속하는 단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학교 도서관에서 〈비밀〉의 단행본을 발견한 이후, 단오의 삶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들어찬다. 그렇다면 백경이 자신에게 쌀쌀맞게 구는 것도,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이후 그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온 것도, 연약한 심장이 툭하면 아파와서 쓰러지게 되는 것도 죄다 작가의 설정놀음이었다는 거니까. 무슨 놈의 열여덟살이 이렇게 슬픈가 했는데, 지금껏 애써 웃으며 견뎌온 모든 고난은 세상을 만든 절대자, 아니, 〈비밀〉의 작가 취향이 그따위여서 그랬던 거였다. 가끔씩 먼저 보았던 미래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작가가 그린 콘티가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백경은 자꾸만 자신을 밀쳐내고 자신은 비련의 사이드 캐릭터로 가끔씩 울먹이며 심장을 부여잡는 캐릭터로 소모될 것이 뻔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미래가 예정된 콘티가.
단오는 격렬하게 운명에 저항한다. 작가가 정해놓은 대로만 살지는 않겠다고. 다행히도 단오는 주연이 아니기에 작가가 생각한 스토리라인 바깥에 방치된 시간들이 넉넉했고, 역설적으로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식으로든 노력한다면, 어쩌면 작가가 정해놓은 스토리라인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단오는 자신보다 더 심하게 스토리라인 바깥에 방치된 듯한 ‘13번’ 소년을 발견하고, 그에게 이 세계의 비밀을 설명하며 말한다. 우리 같이, 운명을 바꿔보자고. 그렇게 13번 소년은 단오와 함께 작가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단오가 붙여준, ‘하루’(로운)라는 이름을 달고.
원작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과 달리,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가 걷는 길은 다소 서글프다. 단오와 하루가 보다 적극적으로 운명을 바꾸며 작가의 의지에 저항했던 원작과 달리,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작가의 의지가 더 강력하고 끈질기게 작동하는 세계를 선보인다. 드라마판에서는 단오와 하루의 저항조차 작가가 만들어 둔 세계와 설정값 안에 갇혀 있고, 그래서 단오와 하루의 저항은 더 절박해진다. 작가의 설정 놀음에 지면 안 된다고, 사소한 약속이나 기억만이라도 운명에 휘둘리지 않은 온전한 내 의지로 지니고 싶다는 단오와 하루의 노력을 보다 보면, 어쩐지 묘하게 서글퍼진다. 단순히 잘생긴 청춘 남녀의 사랑이 애절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저게 나와도 그리 멀지 않은 평범한 장삼이사의 삶인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 삶에, 우리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밀려 닥쳐오는 상황은 너무 거대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나의 노력은 너무도 미력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너무 쉽게 ‘순리’에 항복하고 ‘천명’에 순응하며 살지 않으려고, 단순히 상황이 시키는 대로만 등 떠밀려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뜻처럼 풀리지 않는 삶을 붙잡고 조금이라도 내 의지를 관철시켜보려 노력해본 적이 있는 우리 모두가, 어쩌면 단오와 하루인 게 아닐까? 세상의 주인공은 아닌, 하지만 그럼에도 내 삶의 주인공이고는 싶은.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인용된 바 있는 딜런 토마스의 시 ‘Do not go gentle into the good night’의 첫 연은 단호한 선동으로 가득하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노년은 날이 끝나갈 때 타오르며 포효해야 하니/빛이 사그라드는 것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그럴 일이다. 순순히, 순순히 어두운 밤으로 가지 말 일이다. 앞에 주어진 삶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나아가고 나아가다 보면 또 아는가. 단오와 하루처럼 아주 작은 해피엔딩이라도 손에 쥘 수 있을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