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실제 세계에선 나를 비롯한 평범한 시청자들은 구산댁일 확률보다 초옥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가끔씩 괴담을 찾아서 읽곤 한다. 옛 조상들이 남긴 야사나 기담도 좋고, 물 건너온 일본 쪽 괴담도 좋고, 전통의 빈자리를 온갖 오컬트 괴담으로 채워 넣은 미국 쪽 괴담도 좋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체험을 몇 차례 반복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문득 공포는 죄책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귀신이나 악령, 살인마와 같은 존재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건 결국 ‘나를 해치러 오는 불길한 존재’에 대한 공포인데, 상대가 나를 해치러 올 만한 이유를 상상하다 보면 결국 그 기반에는 그 사회가 집단적 무의식 속에 묻어둔 죄책감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강시 전승은 중원을 두고 지배세력이 반복해서 바뀌는 가운데 전쟁터에서 죽어간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을 동력으로 삼고 있고, 일본의 부라쿠민 괴담은 일본 사회의 신분 차별과 소수민족 탄압에 대한 죄책감에 뿌리를 대고 있다. 미국의 ‘테쿰세의 저주’는 당연히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미국의 뿌리 깊은 탄압과 착취에 대한 죄책감이 그 근원이고, 서구권의 마녀사냥 열풍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비기독교 문명에 대한 탄압에서 온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귀신이 처녀귀신이라는 점은 이래저래 의미심장하다. 처녀귀신의 짝패로 언급되는 몽달귀신이 있긴 하지만, 언급되는 빈도수만 놓고 봐도 처녀귀신 쪽이 압도적이다. 여성에게 정절과 순종을 강요하며 욕망을 억누를 것을 요구했던 조선사회의 죄의식은, 그 욕망을 히스테리컬하게 터트리는 존재를 상상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처녀귀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동아시아 전역에 전승된 구미호 설화가 있다. 처녀귀신의 발원을 상상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역산해보면, 구미호에 대한 공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남자를 먼저 유혹하고, 뭇 사람들과는 달리 날고기를 먹으며, 제 욕망을 발산하면서도 평소에는 그 사실을 애써 숨기고 사는 존재에 대한 공포. 쉽게 말하면 당대 사회 질서로는 도통 통제가 안 됐던, 남들과는 어딘가 달랐던 여성들을 억압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요괴가 구미호가 아니었을까? 제 욕망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여성이나, 남들과는 어딘가 눈빛이나 몸가짐이 다른 여성을 “저거 분명 남자 홀려서 단물 뽑아 먹으려는 거다”라고 몰아세우던 사회적 분위기가, 남자에게서 간을 빼먹으려는 구미호를 상상하게 만든 거겠지.

그래서일까. 최근엔 KBS 2TV <구미호 – 여우누이뎐>(2010)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저 인간들의 세상 속에서 딸 연이(김유정)를 무사히 지키는 게 소원이었던 구미호 구산댁(한다감)은, 우연한 계기로 만난 명망 높은 양반 윤두수(장현성)의 집에 몸을 의탁해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만신(천호진)으로부터 아픈 딸 초옥(서신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비방이 바로 연이의 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윤두수는 한참을 고뇌하다가 끝내 제 손으로 연이를 죽이고 간을 꺼낸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멋대로 하대하지 않던 선량한 양반, 생각이 깨어있는 양반이었던 윤두수조차, 제 자식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앞에서는 살인자가 된다.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꺼내 먹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한 지붕을 이고 살던 여자아이의 간을 꺼내 먹는 서늘한 세상이 <구미호 – 여우누이뎐>의 조선이다.

그 어떤 기준으로 봐도 구산댁과 연이는 철저한 약자다. 둘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보호자인 가부장 없이 둘이 사는 처지이고, 남들과는 다소 다른 존재인데 그 사실이 밝혀지면 환대받을 수 없기에 정체를 꽁꽁 숨기면서 산다. 남들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끼친 적도 없어서, 그저 평온하게 살아가는 게 욕망의 전부였던 구산댁과 연이는, 기득권층인 양반 윤두수 집 딸의 건강을 위해 희생당한다. 그렇게 멀쩡한 모녀를 해쳐 놓고는, 윤두수와 그 집안 식솔들은 떨쳐지지 않는 공포에 휩싸인다. 해코지당하면 어쩌지? 딸을 잃은 구산댁이 이 집안을, 초옥이를 해치면 어쩌지? 탄압한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포로, 사회의 주류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 마이너리티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노릇이겠지.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탄압을 하지 말든가.

방영 당시 이미 구산댁과 연이의 편이 된 시청자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윤씨 집안의 멸문지화와 권선징악을 함께 꿈꿨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실제 세계에선 나를 비롯한 평범한 시청자들은 구산댁일 확률보다 초옥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내가 먹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간을 빼먹은 결과로 살아남은 초옥 말이다. 젠더 이분법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을 탄압하고, 전철이 늦게 온다고 이동권 보장 시위 중인 장애인들을 비난하고, 한 해에 수백 명씩 과로와 부상, 사망 등의 산재 기록을 기록 중인 택배기사들을 착취하고, 약속된 시간 안에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리는 라이더들을 채근하고, 수도권의 반짝거리는 불빛을 누리기 위해 동남권의 발전소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은, 과연 윤씨 일가의 편일까, 아니면 구산댁과 연이의 편일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