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설 곳을 잃어가던 밤무대 연주자들의 삶을 그린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지 벌써 20년이 흘렀다. 암담한 이야기 속 곳곳에 자리한 음악들을 소개한다.


Europa

SANTANA

"그동안 저희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지금 이 곡이 마지막 연주가 될 것 같습니다." 마치 앞으로 수많은 이별을 보여줄 거라고 예고라도 하듯,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작별인사를 하는 밴드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밤무대 밴드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 때문에 떠나는 것이리라. 성우(이얼)가 어정쩡하게 멘트를 끝내고 격렬한 기타 연주가 이어진다. 산타나의 'Europa'다. 산타나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손꼽히는 'Europa'는, '락발라드'에 걸맞는 구슬픈 멜로디 덕분에 한국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곡이다. 산타나는 약물중독에 괴로워하는 친구를 보며 이 곡을 쓰다 내버려 두었다가, 밴드의 건반 연주자 톰 코스터의 도움을 받아 'Europa'라는 연주곡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적적한 작별인사엔 어떤 반응도 없고 그저 무대 아래 손님들은 그저 '부르쓰' 타임을 즐기고 있을 뿐.


세상만사

송골매

색소폰을 연주하는 현구(오광록)마저 떠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3인조가 되어 수안보에 짐을 푼다. 성우는 울릉도에 갔으면 갔지 고향인 수안보엔 오고 싶지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당연히 고향 사람들을 마주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원년 멤버였던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난다. 이제는 약사, 환경운동가, 건설사 직원이 된 친구들과 온 노래방에서 성우는 송골매의 '세상만사'를 부르고,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세상만사'를 부르는 어린 시절로 이어진다. 1983년에 밴드를 하는 고등학생에게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던 록밴드 송골매는 우상과도 존재였을 것이다. 배철수가 특유의 털털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세상만사'는 초창기 송골매의 베이스스트 이응수가 노랫말을, 기타리스트 지덕엽이 곡을 썼다. 송골매 1집으로 처음 발표됐던 1979년엔 별 반응이 없었는데, 데뷔 앨범이 실패한 뒤 배철수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밴드를 떠나고 블랙테트라 출신의 구창모를 비롯한 멤버들을 보완해 다시 결성한 송골매의 2집에 다시 수록되면서 빛을 볼 수 있었다.


I Love Rock 'N' Roll

Joan Jett & The Blackhearts

성우(박해일)와 친구들의 '세상만사'가 끝나고, 인희(문혜원)가 이끄는 충주여고 7인조 밴드의 'I Love Rock 'N' Roll'이 이어진다. 밴드 '뷰렛'의 멤버인 문혜원이 직접 연기한 만큼 출중한 노래 실력을 선보이는 인희의 밴드는 순식간에 학예회장을 뒤집어버린다. 야성적인 에너지로 무대를 흔드는 인희에게 성우는 첫눈에 반한다. 앞서 등장한 'Europa'처럼 한국인이 유독 사랑하는 록 넘버인 'I Love Rock 'N' Roll'은 여성 로커 조앤 제트가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75년 영국 밴드 애로우스(Arrows)의 원곡을 런어웨이즈(The Runaways)와 함께 영국 투어 중이었던 조앤 제트가 발견하고 리메이크해서 7주간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원곡을 훌쩍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다. 요즘 세대들에겐 조앤 제트보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커버 버전이 더 익숙할 것이다.


불놀이야

옥슨 80

성우와 친구들은 밴드 옥슨80의 충주 리사이틀을 보고 그 흥분을 고스란히 품고 학원으로 와 '불놀이야'를 연습한다. 관객 하나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이다. 연주는 머지않아 학원 원장(김영수)이 나타나 "니놈들은 어떻게 공연만 보고 오면 정신이 없어, 이런 망나니 같은 놈들"하고 잔소리를 듣고서 끝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불놀이야'는 "종합예술인" 홍서범(과 이제는 <개그콘서트> 밴드 기타리스트로 더 유명한 이태선)이 이끌던 밴드 옥슨80의 노래다. 대학교 그룹사운드의 열풍이 대단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엔 전국의 로커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자리가 여럿 개최됐는데, TBS의 '젊은이의 가요제'도 그중 하나였다. 건국대학교 밴드 옥슨80은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금상을 차지하고 그 이듬해인 1981년 데뷔 앨범을 내놓았다.


The Wind Cries Mary

JIMI HENDRIX

성우와 '선생님'의 연은 수안보에서 다시 이어진다. 여느 때처럼 동네를 거닐던 성우는 길에서 우연히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온 선생님을 만나고, 드러머 강수(황정민)가 고향으로 떠나자 그에게 드럼 연주를 맡긴다. 어린 시절 인희를 짝사랑하던 성우가 힘들어하자 선생님은 "마음이 쓰릴 땐 이게 묘약"이라며 소주를 따라준다. 스피커에선 지미 헨드릭스의 'The Wind Cries Mary'가 자그맣게 흐르고 있다. 2000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대낮에 가만히 누워 'The Wind Cries Mary'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성우가 돌아오자 "언제 들어도 예술이구만. 이 친구와 나하고는 42년생 동갑이거든. 근데 이 친구는 스물여덟 살에 요절을 했고, 나는 요 나이가 되도록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게... 한심허지 않어?" 하면서 지난 세월을 이야기한다. 지미 헨드릭스가 (아마도 성우가 태어났을 무렵인) 1967년 발표한 'The Wind Cries Mary'는, 무대에서 기타를 치아로 연주하고 불을 피우던 격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헨드릭스의 흔한 이미지와는 정 딴판인 발라드다. 가슴에 스미듯 잔잔히 소리내는 기타와 쓸쓸한 헨드릭스의 목소리는 '서울 야곡'과 더불어 노인이 되어서 하루하루 술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선생님의 마음을 다독인다.


빗속의 연가

김현식

아마도 성우는 김현식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 강수가 아직 밴드에 있던 때, 마음에 드는 여자 손님을 보자 잘 보이려고 자기가 보컬을 맡겠다면서 레퍼토리에 있는 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을 선보인다. 알코올중독 증세가 점점 심해지던 선생님이 기타를 남긴 채 홀연히 떠나고, 여자를 밝히는 정석(박원상)이 심한 부상을 입자, 성우는 홀로 와이키키 나이트클럽보다 훨씬 작은 업소에서 연주하면서 지낸다. 어느날 손님이 아무도 없는 업소에서 성우는 쪼그려 앉아 혼자 김현식의 '빗속의 연가'를 부른다. 그 모습이 참 슬퍼 보이지만, 물건을 보내러 온 인희(오지혜)가 멀찌감치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성우의 곁엔 인희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안도가 들기도 한다. '빗속의 연가'는 김현식이 그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내세운 3번째 앨범의 첫머리에 놓인 곡이다. '빗속의 연가'와 더불어 '가리워진 길', '비처럼 음악처럼' 등이 수록된 3집은 흔히 김현식이 발표한 최고의 앨범으로 손꼽힌다.


아파트

윤수일

성우의 처지는 점점 나빠진다. 어느 날 밤 자기를 찾아와 "행복하니? 우리들 중에 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고" 말하던 친구까지 세상을 등졌다. 다시 찾아온 고향에서 성우는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기타를 놓을 수 없다. 음악이 좋아서인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인지. 곁에 아무도 없이 기타를 잡고 노래하는 성우의 눈엔 눈뜨기 보기 어려운 추잡한 인간들이 보인다. 홀딱 벗고 난리를 피우던 중년 남자는 무표정히 '아파트'를 부르는 성우에게 다가와 술과 돈을 건네며 "귀하신 사장들이 다 벗었는데 개뼉다구 같은 밴드 주제에" 하면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성우는 알몸으로 '아파트'를 계속 노래한다. 눈물이 치밀어올라 TV에 고개를 돌리면 고등학교 밴드 친구들이랑 다 벗고 해변을 달리던 때가 보인다. '아파트'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커 윤수일이 1982년 발표해 '국민가요' 반열에 오른 명곡이다. 지금까지도 응원가로 쓰일 만큼 쾌활한 리듬과 사운드 때문에 그 안에 담긴 가사가 더 적적하게 느껴진다.


사랑밖엔 난 몰라

심수봉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비슷하다. 다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사뭇 다르다. 정석의 연주와 함께 성우가 김현식의 '회상'을 부르고 난 뒤, 뒤에서 장막이 오르면 드레스를 차려입은 인희가 무대 가운데에 서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노래한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노래 실력이 먼저 귀를 사로잡는데, 이윽고 무대에 선 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띄워져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었고, 지금도 그 한가운데에 있을 테지만, 어린 시절 사랑했던 인희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 성우는 행복한 것 같다. 작은 제스처 하나하나 표현하면서 인희의 관능적인 노래 역시 생계의 고통보다는 노래하는 이의 열정이 먼저 보인다. 박정희 암살사건 이후 오랫동안 가수로서 활동하지 못했던 심수봉은 복귀와 함께 내놓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 이어 '사랑밖엔 난 몰라'까지 크게 성공하면서 시대의 그늘을 얼마간 벗을 수 있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