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가 <저스티스 리그>로 귀환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슬픔으로 제작 일선에서 물러난 연출자를 대신해 스튜디오가 업계 라이벌에서 일한 새 감독 조스 웨던을 모셔와 70%가량을 새로 찍어 2시간이 채 못 되는 길이로 재편집해 프랜차이즈의 관 짝을 덮을 만큼 실패한 블록버스터를, 팬들의 거센 온라인 청원에서 촉발돼 극장이 폐쇄될 정도로 악화된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웬만한 중급 영화를 찍을 법한 추가 예산을 지원받아 4시간짜리 분량으로, 그것도 극장이 아닌 OTT 서비스로 다시 공개한 지난 4년간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영화와도 같은 대하 스토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이 할리우드에서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위대한 걸작 <악의 손길>은 후반 작업 시 의견 충돌로 오슨 웰즈를 해고하고 편집자 출신 연출자 해리 켈러를 고용해 재촬영을 거쳐 완성시켰으며, 40년 뒤에 웰즈의 메모를 바탕으로 월터 머치가 복원판을 완성해 공개한 바 있다. 브라이언 헬겔랜드의 데뷔작 <페이백>은 시사 반응이 좋지 않자 대타 연출자를 투입해 완성시킨 후 시간이 지나 2차 매체로 감독판을 선보였고, <엑소시스트> 4편은 원래 감독인 폴 슈레이더 버전과 대타 감독인 레니 할린 버전이 각각 따로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큰 예산(제작비만 3억 달러에 이른다!)이 들어간 작품이 유례없는 청원 운동과 범세계적인 팬데믹을 발판 삼아 고액의 제작비(7천만 달러를 배정받았다!)를 들여 더 긴 오리지널 버전으로 부활한 경우는 가히 전무했다. 이는 대형 스튜디오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는 모양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미 봤지만 전혀 본 적이 없는 <저스티스 리그>
그러나 워너는 이 위기를 자사의 OTT 서비스를 부흥시킬 기회로 여겼고, 잭 스나이더는 개인적인 상처로 완성하지 못했던 작품을 온전히 손볼 계기를 얻었다. 조스 웨던과 워너를 상대로 설전을 벌리던 배우 레이 피셔에게도 반전을 맞이할 찬스였다. 유니버스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DC는 <원더우먼>과 <아쿠아맨>, <샤잠>, <조커> 같은 스탠드얼론의 연이은 성공으로 흥행과 비평적인 악몽에서 다소 벗어난 상황이었다. 팬데믹 속에서도 극장 개봉을 강행한 <원더우먼 1984>는 원하던 성적을 얻진 못했지만 OTT 서비스로 동시에 개봉된 최초의 메이저 블록버스터란 기록을 세우며 변화된 영화 배급 시스템을 제시한 모델이 되었다. 여기에 대중들의 지지를 업고 돌아온 <저스티스 리그>의 부활은 영화 속 슈퍼맨의 부활만큼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될 것이 자명했다.
이렇게 나온 <저스티스 리그: 스나이더 컷>은 이미 봤지만 전혀 못 본 적이 없는 영화였다. 기존의 와이드스크린 사이즈(1.78:1)가 애초 의도대로 스탠더드 사이즈(1.33:1)로 복원됐으며, 밝고 경쾌했던 색감은 스나이더 특유의 높은 대비를 자랑하는 스타일리시한 톤으로 바꿨다. 상영시간도 120분에서 242분으로 확장돼 미공개 컷들이 대거 활용됐고, 6부작 미니시리즈로도 고려됐던 영향이 남아 6개 챕터와 에필로그를 나눠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게 구성했다. 아울러 웨던이 구사했던 유머와 가족영화 같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R등급으로 대폭 수위를 높였다. 길어진 시간 덕분에 각 캐릭터별 사연과 동기를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으며, 스테픈 울프의 디자인도 대폭 수정돼 끝판대장 격의 위용을 되찾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톰 홀컨보르흐(정키 XL)의 음악이 돌아왔다!
영화도 두 개 버전, 음악도 두 개 버전
온라인상에서 스나이더 컷에 대한 해시태그 청원이 이어지며 동반으로 요구됐던 것이 바로 톰 홀컨보르흐의 음악에 대한 복권이었다. 한스 짐머를 도와 <맨 오브 스틸>에서부터 DCEU의 사운드 직조에 힘을 보탰던 그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짐머와 함께 공동 작곡가로 올라섰고, 짐머가 잠시 슈퍼히어로 계를 떠난 상황에서 <저스티스 리그>로 단독 크레딧을 거머쥘 예정이었다. 하지만 50%가량 진행되던 결과물은 조스 웨던의 부임으로 모두 무위로 돌아가버렸다. 홀컨보르흐는 웨던을 딱 한 번 만났다. 웨던은 기존 작업물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당연히 음악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미팅 이후 스나이더와 통화하며 홀컨보르흐는 이 작업에서 물러나야 하나 고민을 토로했는데, 다음날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대니 엘프만과 작업하기로 했다는 통고였다.
웨던의 선택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스나이더의 애초 구성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에 홀컨보르흐가 작업한 스코어가 어울릴 리 없었다. 그간 DCEU에서 울려 퍼지던 잿빛의 장중하고 타악 리듬을 극대화한 미니멀한 사운드는 전통스러운 영웅적 테마들로 커버됐고, 히어로 음악의 장인 엘프만은 자신의 최대 걸작인 배트맨 테마를 비롯해 한스 짐머가 만든 원더우먼 테마와 존 윌리엄스의 전설적인 슈퍼맨 선율까지 가져왔다. 후반 작업에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급격하게 변화된 색채에 당황스러워했다. 작업에서 물러난 홀컨보르흐는 조지 밀러를 비롯해 피터 잭슨과 제임스 카메론이 진두지휘하는 여러 프로젝트에 탑승했고, <데드풀>과 <툼레이더>, <슈퍼 소닉> 등 흥행작을 경험하며 4년 전과는 전혀 다른 레벨의 영화음악가로 성장했다.
무아지경에 빠져들 정키XL의 슈퍼 액션 영화음악
2020년 5월 워너에서 스나이더 컷에 대한 승인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자 톰 홀컨보르흐에게도 복귀 연락이 왔다. 그는 2016년부터 2017년에 걸쳐 작업한 음악을 다시 돌아봤고, 그 속에서 그만뒀을 때의 부정적인 기운과 심정을 감지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한참 전 세계 전염병이 돌던 6개월간 작업용 컴퓨터와 몇 개의 신디, 드럼 키트와 기타 등만 가지고 어시스턴트 하나 없이 홀로 작업실에 틀어박혀 영화 상영 시간에 조금 모자라는 234분 54트랙에 이르는 분량의 음악을 쓰고 녹음하는데 투자했다. 일주일에 두 번 스나이더 감독이 괴롭히는 것 말고는 방해할 사람도 없었다. 스트링과 브라스 섹션은 추후 런던 에어 스튜디오에서 원격으로 60인조 뮤지션들과 레코딩이 진행됐고, 원더 우먼의 테마에 야성적으로 덧입힌 파워풀한 보컬은 이란 출신의 소프라노 델라람 카마레가 목소리를 빌려줬다.
홀컨보르흐는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음악적 기조를 이어가는 한편, <저스티스 리그>에 새로 합류하는 캐릭터들을 위해 각각의 테마와 색채를 부여하는 걸 잊지 않는다. 존 윌리엄스의 상징적인 슈퍼맨 테마 대신, 한스 짐머가 만든 <맨 오브 스틸>의 모티브를 재활용하며, 원더 우먼의 인장과 같은 일렉트릭 첼로로 휘몰아치는 사이키델릭한 선율 위로 이국적인 여성 목소리를 덧입혀 그녀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팀의 구심점이자 비극적인 사연을 지닌 사이보그를 위해선 섬세한 피아노와 스트링을, 질주감의 플래시에겐 일렉트릭 기타를, 고전 신화 속 이야기 같은 아쿠아맨에겐 장중한 브라스로 극적인 요소를 부각시켰다. 영웅들을 규합하고 슈퍼맨의 유지를 받드는 책무를 짊어진 배트맨을 위해 새로운 심각한 테마를 소개하고, 이들과 대척점에 선 스테픈 울프와 다크사이드에겐 무겁고 어둡게 내려앉는 합창을 깔아 강력한 포스와 무력감을 절감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번 스코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압도적인 공세의 타악기다. <맨 오브 스틸>에서 15명의 위대한 드러머를 초빙해 드럼 오케스트라로 슈퍼 파워의 위용을 과시한 바 있는 것처럼 정키XL이 디자인한 다크하고 묵직한 힘의 소리들은 90년대 그가 몸담았던 거친 메탈릭 사운드의 위력을 재현하며 무자비할 정도로 화려한 비주얼을 청각적으로 지배하려 든다. 이는 마치 일개 만화 속 캐릭터가 아닌 신화나 종교 속 대상과 마주했을 때 인간이 본질적으로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경외심에 가까운 압도적인 사운드처럼 들리기도 한다. 점층과 점강을 반복하며 미니멀한 테크노와 트랩 뮤직 사이의 어딘가를 헤매는 과격한 질주감의 액션 스코어링은 그가 가장 잘하는 장기이자 특기로, 과도하게 길고 반복적이며 시끄럽지만 황홀한 무아지경에 빠져들 만큼 중독적이기도 하다.
삽입곡들과 차트를 강타한 <저스티스 리그> 음악
삽입곡을 극적으로 구사하길 좋아하는 잭 스나이더답게 영화 초반 각 캐릭터들의 감정과 상황을 표출하기 위해 다양한 노래들이 쓰였다. 다만 브루스 웨인이 처음 아쿠아맨을 만나러 가서 문전 박대 당하는 순간에 주민들이 부르는 아이슬란드의 전통민요 ‘비수르 바트넨다 로슈’(Vísur Vatnsenda-Rósu)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골랐다고 한다. 닉 케이브와 더 배드 씨즈의 노래가 두 번이나 흐르는 게 눈에 띄는데, 슈퍼맨을 잃은 로이스 레인의 상실감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모습에선 ‘디스턴트 스카이’(Distant Sky)가, 폭풍 속에서 선원을 구하고 깡 위스키를 들이키며 바다로 향하는 아쿠아맨의 모습에선 ‘데어 이즈 어 킹덤’(There Is A Kingdom)이 각각 선곡됐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배리의 첫사랑인 아이리스를 교통사고에서 구하는 로맨틱한 장면에서는 로즈 베티가 커버한 ‘송 투 더 사이렌’(Song to the Siren)이 쓰여 미소 짓게 만든다.
엔딩을 장식하는 건 앨리슨 크로우가 커버한 ‘할렐루야’(Hallelujah)로, 스나이더 감독의 딸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이자 실제 딸의 장례식에서 앨리슨 크로우가 직접 불렀던 곡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 지은 스나이더 부부가 딸에게 영화를 바치며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엔딩곡을 선택했다. <저스티스 리그: 스나이더 컷> 사운드트랙은 출시되자마자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로 데뷔했고, 단 24시간 만에 스포티파이에서 100만 번 이상의 스트리밍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