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중견급 배우를 기용하기보다는 관객에게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뉴페이스를 주로 캐스팅하던 당시의 MCU에서는(물론 당시로써는 재정 상황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대표작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거물급이었던 배우 스칼릿 조핸슨이 강력한 의사를 어필해 참여했다는 점도 상당한 이유였겠으나, 여러 편의 MCU 타이틀에서 조력자로서 그려진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는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어벤져스의 멤버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이후에도 홀로 어벤져스 타워를 지키기도 했던 블랙 위도우였지만 솔로 무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관적인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비극적인 방식일지언정 캐릭터 서사를 훌륭히 마무리한 이 시점, 다시금 블랙 위도우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어벤져스> 시리즈를 통해 보았듯 나타샤의 지난날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그 때문에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소녀를 '블랙 위도우'로 바꿔놓고야 말았던 KGB 산하의 조직, 바로 레드 룸에서 시작됐다.


<블랙 위도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1945년부터 1991년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무려 46년간 지속된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중심 세력을 기반으로 세계를 반으로 갈랐던 이 시기에는 총구를 들이미는 혈투보다는 첩보전과 정보전, 대리전 등의 방식으로 국가들이 서로 대립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블랙 위도우는 이 냉전 체제하의 소련, 그 안에서도 KGB라는 조직에 의해 탄생했다는 배경을 가진 캐릭터다. KGB는 냉전 체제하에서 적국의 정보를 수월하게 빼내고 요인을 암살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꼈고, 이에 따라 레드 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코믹스에서 묘사한 레드 룸

레드 룸의 수장인 드레이코프는 어린 소녀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피도 눈물도 없이 '미션'에만 집중할 수 있는 스파이들을 육성하려 했고, 나타샤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녀들이 이 과정에서 자아를 잃고 세뇌당해야만 했다. 원작에서는 나타샤 역시 아직 어린 소녀였던 시절 첫 임무(살인)를 수행하고, 성공하자 칭찬을 받았으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소녀들을 적 앞에 내몰아, 그들이 어린이라는 점을 이용해 상대의 경계심이 수그러든 사이를 노려 암살한다. 이런 임무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블랙 위도우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나타샤와 마찬가지로 조직의 도구로서 이용당한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은, 훈련을 모두 수료한 소녀들에게 불임수술을 강제로 시킨다는 점이다. 여성 요원으로서는 약점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미연에 제거한다는 이유에서지만,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레드 룸 출신의 소녀들은, 물론 나타샤도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상처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코믹스의 블랙 위도우

코믹스 <BLACK WIDOW>에서 나타샤는 이 레드룸으로 돌아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암살자 훈련을 받고 있는 수많은 소녀들을 구해내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블랙 위도우'지만 더 이상 '블랙 위도우'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암살자가 아닌 슈퍼히어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 그것이 나타샤가 선택한 새로운 삶이었다.


<퍼스트 어벤져>

MCU에서의 냉전 시대는 <퍼스트 어벤져>에서 묘사된 적이 있다. 우리는 캡틴 아메리카 솔로 무비의 첫 번째 타이틀인 <퍼스트 어벤져>를 통해 페기 카터를 비롯해 스티브 로저스, 버키 반즈, 그리고 나치 산하에 있던 하이드라와 레드 스컬을 만나본 적이 있었으며 TV 시리즈 <에이전트 카터>에서 레드 룸 출신의 요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 나치 뒤에는 하이드라가 있었고, 전 세계를 점령하겠다는 독일 나치즘의 욕망을 조종한 것이 하이드라라는 설정이었다. 히틀러의 죽음 및 패전으로 나치당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이 때문에 하이드라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종전 후에도 이들을 막고 평화를 수호할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이런 요구 속에서 창립된 것이 쉴드라고 할 수 있다.

<에이전트 카터>에서 등장한 레드 룸

캡틴 아메리카가 북극에 추락한 이후 주요 전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쉴드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물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시점에 이르러서는 쉴드조차 하이드라에 침식당해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되지만, 닉 퓨리와 마리아 힐 그리고 어벤져스 멤버들은 여전히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전투를 계속하게 된다.

<블랙 위도우>

이 일련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샤 로마노프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송두리째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즉 윈터 솔져가 그랬듯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선택지를 박탈당했고,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세뇌까지 해 버린 상황이었으며 나타샤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계획에 따르기 위해 훈련받았으므로 더 심각했다.

슈퍼히어로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전쟁의 연속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속에서 뛰어난 재능과 두뇌를 가지고도 운명에 이용당해야 했던 이들이 또다시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해 싸움을 계속한다는 점이야말로 그들이 영웅이어야 하는 이유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

MCU의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는 꽤나 다층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솔로무비가 없었던 탓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음에도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이나 지난 행적들은 호크아이와의 대화 등 여러 부분에서 스치듯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의 과거 속에는 이제까지 MCU에서 언급된 적 없는 냉전 체제하의 KGB와 그 조직, 레드룸의 실체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희생당했고, 누군가를 무고히 희생시키기도 했겠으나, 결국은 가장 숭고한 희생을 함으로써 영웅으로 최후를 맞았던 캐릭터이기에 나타샤의 삶은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운이 남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MCU의 블랙 위도우 스토리가 얼마나 숨겨져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여러 번의 개봉연기를 거쳐 드디어 스크린에 상영될 <블랙 위도우>가 팬데믹 사태를 맞아 오랫동안 지속된 MCU의 공백기를 끝낼 예정이다. 조금 늦었지만, 이 영화가 블랙 위도우 그리고 나타샤 로마노프의 삶에 대한 충분한 추모가 되기를 바라며.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