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영화감독과 프로듀서 등 영화 인력이 시리즈로 넘어가는 풍경은 이제 어색하지 않다. 두 업계의 크로스오버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반가운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감독의 세계에 보다 길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겠다. 지금 바로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재생해서 후회할 일 없는 시네마틱시리즈 5편을 소개한다.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들마저도, 첫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알 거다. 길어서 걱정할 게 아니라, 훅 봐버려서 금방 끝나버릴까 걱정해야 할 시리즈란 걸. 한 화 한 화 아껴 보고 싶은 시리즈란 걸.


트윈 픽스

데이빗 린치 감독 출연 카일 맥라클란, 마이클 온키언, 매드첸 아믹, 다나 애쉬브룩 │ 시즌 2 │ ABC

1990년 봄 첫 에피소드 공개와 함께 전설이 된 시리즈 <트윈 픽스>. 데이빗 린치가 연출하고 마크 프로스트가 각본을 쓴 이 쇼는 한 소녀의 죽음으로 막을 연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작은 시골 마을 트윈 픽스의 해변에서 로라 팔머(셰릴 리)의 시신이 발견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10대 소녀가 피를 흘리며 맨발로 철길을 걸어 나오는 일이 있자, FBI 요원 데일 쿠퍼(카일 맥라클란)가 트윈 픽스에 와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수사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뒤틀린 욕망과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면서 <트윈 픽스>는 컬트, 미스터리, 수사, 호러, 멜로, 치정, 온갖 장르를 겸하게 된다.

지난 2017년, 린치는 시즌2 종영 후 25년 만에 세 번째 시즌을 내놓았다. 현실에서와 같이 극 중 시간도 25년이 흘러 시즌3은 트윈 픽스의 현재를 담았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배우들과 더불어 아만다 사이프리드, 나오미 왓츠, 모니카 벨루치 등 새 배우가 합류해 새 미스터리를 풀어나가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있었지만. 특별한 장치 없이도 정의할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던 린치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에피소드 내내 반복적으로 배경에 흐르던 느린 단조 음악처럼, 느린 속도감을 자랑하던 컬트 드라마가 도대체 어떻게 1990년 방영 당시 33%라는 미친 시청률을 거뒀으며, 25년 만에 다시 제작되어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지. <트윈 픽스>의 매력이 궁금하다면, 세 개의 시즌과 시즌2 종영 이듬해 나온 극장판까지 모두 왓챠에서 볼 수 있다.


트루 디텍티브

캐리 후쿠나가 감독 출연 매튜 맥커너히, 우디 해럴슨, 미셸 모나한 │ 시즌 3 │ HBO

캐리 후쿠나가. 이름이 익숙하지 않을 이들을 위해 그의 작품으로 설명을 더 해보겠다. 후쿠나가는 올 10월 개봉을 앞둔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연출했다. 영국 대표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미국인 감독으로 주목받기 전부터, 그는 호러 <그것>의 각본, 엠마 스톤 주연 시리즈 <매니악>의 연출을 맡으며 유의미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트루 디텍티브> 시즌1이다.

매튜 맥커너히, 레이첼 맥아담스, 콜린 파렐 등 화려한 배우진을 갖춘 <트루 디텍티브>의 각 시즌은,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를 갖는다. 어느 시즌부터 시작해도 무방하다는 말인데. 매튜 맥커너히와 우디 해럴슨이 투톱 주연으로 출연한 첫 번째 시즌은 1995년과 2012년 사이에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쫓는 두 루이지애나 경찰국 소속 형사의 이야기다. 속도감보다는 정교한 리얼리즘으로 승부한 첫 화부터 좌중을 사로잡아 역대 HBO 시리즈의 파일럿 중 가장 높은 시청기록(230만 명)을 세웠고, 연출을 맡은 캐리 후쿠나가에게는 에미상 감독상을 안겼다. 가장 인기가 좋았던 시즌은 분명 첫 번째 시즌이지만, 시즌2 종영 후 3년의 재정비 기간을 갖고 돌아온 시즌3에 대한 평도 좋았다. 마허샬라 알리와 스티븐 도프가 투톱 주연으로 출연한 세 번째 시즌은 아칸소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남매실종사건의 범인을 쫓는 두 형사의 이야기로. 두 개의 시간대를 교차로 그리는 앞 두 시즌과 달리 세 개의 시간대를 엮었다. 정교하게 짜인 타임라인이 몰입감을 높였다는 평을 받은 시즌3은 <블루 루인> <그린 룸>의 제레미 솔니에 감독이 연출했다.


빅 리틀 라이즈

장 마크 발레 감독 출연 리즈 위더스푼, 니콜 키드먼, 쉐일린 우들리,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 시즌 2 │ HBO

아내 잃은 극한의 슬픔을 무감정으로 표출한 <데몰리션>의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죽음을 30일 앞두고 생의 끈을 놓지 않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론(매튜 맥커너히). 심적 고통을 신체의 고통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마주하던 <와일드>의 셰릴(리즈 위더스푼). 예리한 심리 묘사에 장기를 보여왔던 장 마크 발레가 시리즈를 만들면? 감독의 첫 번째 TV 연출작 <빅 리틀 라이즈>는 캘리포니아의 부촌 몬터레이의 평범한 주부들이 한 살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남들 눈에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리즈 위더스푼, 니콜 키드먼, 로라 던, 쉐일린 우들리, 그리고 조 크라비츠. 할리우드 대표 배우들을 TV 신으로 데려와 화제를 모았던 <빅 리틀 라이즈>. 첫 번째 시즌 방영 당시 각본, 연출, 연기,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아, 그해 에미상에서 1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시즌2부터는 메릴 스트립까지 가세해 가뜩이나 탄탄한 라인업을 보강하기도 했다. 시즌2는 <폭풍의 언덕>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의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앞서 말했듯 몬터레이는 부촌이다. 캐릭터들의 집 구경은 덤이다.


리틀 드러머 걸

박찬욱 감독 출연 플로렌스 퓨,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마이클 섀넌 │ 시즌 1 │ BBC

<스토커>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박찬욱 감독의 첫 번째 TV 연출작. <리틀 드라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프로젝트에 연루되어 스파이가 된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작전을 둘러싼 요원들의 이야기다. 스파이 마스터 마틴(마이클 섀넌)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을 잡기 위해 한 편의 극을 꾸린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극장을 빌려 NG는 용납되지 않는, 컷이 없는 연극을 하는 거다. “내가 이 드라마의 제작자이자 작가이자 감독입니다. 당신 배역에 대해서 얘기 좀 하고 싶군요.” 첫 화의 마지막에서 마틴이 찰리를 쇼의 주연으로 맞아들이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박찬욱 감독은 존 르카레의 원작 소설을 영상화하게 된 이유를 상기하며, 이 이야기에서 마틴이 맡은 포지션이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맞닿아있어 흥미를 느꼈다고 했는데. 작품 안과 바깥에서 두 명의 감독이 호흡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하다.

감독은 전형적인 첩보물의 칙칙한 톤을 버리고, 원색으로 대변되는 찰리의 생생함에 주목했고. 찰리 역에 곧바로 플로렌스 퓨를 떠올렸다. 그는 <레이디 맥베스>에서의 퓨의 연기를 좋게 봐 <아가씨> 홍보차 영국에 방문했을 때 퓨와 아침 식사를 함께했고, 둘의 연이 <리틀 드러머 걸>로 이어졌다는 비화를 직접 전하기도 했다. 마틴의 극 속에서 찰리의 상대역을 맡은 요원 가디 역에 대한 비화도 언급했는데. 위에서 소개한 <빅 리틀 라이즈>에서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퍼포먼스를 보고 그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셀레스트(니콜 키드먼)의 이중성을 가진 남편 페리를 연기했다. 작품 속 그의 모습을 보고 모순된 정체성과 인정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애잔한 인물을 잘 표현해내리라 생각했다고.


위 아 후 위 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출연 잭 딜런 그레이저, 조던 크리스틴 시먼, 클로에 세비니 │ 시즌 1 │ HBO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욕망과 사랑 그리고 성장을 말하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의 첫 번째 TV 쇼 연출작 <위 아 후 위 아>를 통해 또 한 번 그가 잘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위 아 후 위 아>는 이탈리아 북부 키오자에 위치한 미군 부대에서 생활하는 10대들의 이야기다. 쇼는 프레이저(잭 딜런 그레이저)와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시먼)이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긴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얼굴에 콧수염을 붙이며 케이틀린은 프레이저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냐고 묻는다. 프레이저는 “잘 모르겠어. 너 아직 너야?”라고 답한다. 프레이즈의 반문은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 여자가 되고 싶든, 남자가 되고 싶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네가 맞는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맞는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맞는지. 중요한 건 그거다.

<위 아 후 위 아>는 성장, 풍경, 음악을 다루는데 능한 구아다니노의 8시간짜리 장기자랑과도 같다. 미묘하고도 통렬한 성장기를 겪는 이들의 솔직한 몸짓에 구아다니노의 관조적 연출과 존 애덤스의 음악이 더해져, TV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장면보다도 영화적인 장면들이 탄생했고. <위 아 후 위 아>는 쇼가 방영되었던 지난해 말, 한 해를 갈무리하며 수많은 매체에서 꼽은 올해의 TV 시리즈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언급됐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