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개봉한 <고질라 VS. 콩>이 작년의 <나쁜 녀석들: 포에버> 이후 최초로 전 세계 4억 달러를 넘긴 할리우드 영화가 됐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기대작 <테넷>도, DC의 구세주 원더우먼의 속편인 <원더우먼 1984>도 도달하지 못한 기록이다. 이로써 <고질라 VS. 콩>은 코로나19 기간 중 개봉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흥행한 할리우드 영화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물론 다른 기대작들이 줄줄이 연기된 상황에서 어부지리로 얻은 왕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이 기간 중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적을 보장하던 이벤트 무비로 성장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단 한편도 개봉하지 않았고, 자동차로 모든 걸 해내며 전 세계 흥행 역사를 갈아치우던 <분노의 질주> 신작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고별식이 될 25번째 007 영화도,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드니 빌뇌브의 SF <듄> 등도 모조리 미뤄졌다.


코로나 시대 가장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

하지만 극장 개봉과 동시에 OTT 서비스인 HBO MAX로 풀렸음(불법 유통이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코로나가 아닌 상황에서 개봉했던 ‘몬스터버스’의 세 번째 작품인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의 흥행 성적을 이미 추월했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표로 남을 듯하다. 자국 시장의 괴력 같은 푸시를 받는 특수한 상황의 중국 영화 <니하오, 리환잉>과 <당인가탐안 3>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흥행 지지를 받아 월드 박스오피스 3위에 랭크된 <고질라 VS. 콩>의 선전으로 다시 극장가에 활력이 돌 거라는 기대감마저 생기고 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워너와 레전더리 픽쳐스 그리고 토호의 계약은 만료되지만, 현재의 흥행에 고무된 제작진들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불을 지피고 있어 추가 연장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5월 개봉 예정인 일본 시장 반응에 따라 토호가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시리즈 첫 편 <고질라>가 북미에서만 2억 달러를 넘기며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던 것과 달리 점점 상승하는 제작비에 반비례해 세 번째 편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 이르러선 간신히 북미 1억 달러를 넘기며 프랜차이즈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는데, <고질라 VS. 콩>의 연출을 맡은 애덤 윈가드는 마치 지난 작품들에 대한 관객들의 원성과 요구를 수용한 것 마냥 어리석은 인간 쪽 플롯을 대폭 줄여버리고, 대괴수들의 격돌에 모든 걸 쏟아부으며 스펙터클한 태그매치 블록버스터를 완성해냈다. 아드레날린을 대방출시키며 무자비하게 때리고 부수고 박살 내는 쑥대밭의 쾌감은 가히 역대급 황홀경을 선사한다. 스토리와 개연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관객들이 진정 원했던 비주얼의 향찬에 올 인한 제작진의 선택이 주효했다. 여기에 타격감을 제대로 뒷받침해 주는 톰 홀컨보르흐의 액션 스코어링도 한몫한다.


이후쿠베 아키라 영향 하의 몬스터버스 음악

재밌게도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버스의 음악들은 전부 다 다른 작곡가들이 담당했다. 보통 흥행하면 그 프랜차이즈의 음악을 쭉 도맡는 것과 달리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참여한 <고질라>를 시작으로, 헨리 잭맨의 <콩: 스컬 아일랜드>, 베어 맥크레리의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그리고 이번 톰 홀컨보르흐의 <고질라 VS. 콩>까지 테마나 모티브가 일절 공유되는 바 없이 저마다 작곡가만의 독특한 색채를 드러냈다. 6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이후쿠베 아키라의 그 유명한 테마를 직접 가져온 것도 베어 맥크레리가 음악을 맡았던 세 번째 작품뿐이었고,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톰 홀컨보르흐는 각자 자신만의 고질라 사운드를 새로 창조해냈다. 물론 그들의 음악은 이후쿠베 아키라가 들려줬던 테마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게 사실이고, 의도적으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유사한 방향성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사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이후쿠베 아키라의 테마뿐만 나이라 고세키 유지가 작곡한 <모스라>의 주제가까지 사용하던 터라, 이번 작품에서도 내심 이후쿠베 아키라가 작곡한 1962년작 <킹콩 대 고지라>의 메인 테마마저 활용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팬들도 있었으나 홀컨보르흐는 과감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밀어붙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유명한 테마들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맨 오브 스틸>에서 한스 짐머가 존 윌리엄스의 슈퍼맨 테마를 사용하지 않은 지점에 빗댔다. 과거에 나온 영화와 현재 나온 영화의 성격과 분위기가 다르고, 굳이 기존의 테마를 가져온다고 해도 1:1 대응은 불가능하기에 그 본질을 담고 있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톰 홀컨보르흐는 이후쿠베 아키라의 테마가 가지고 있던 핵심을 재조합해 자신만의 버전으로 고질라 사운드를 완성했다.


괴수 그 자체인 <고질라 VS 콩> 음악

반복적인 3음절 프레이징으로 스트링과 브라스를 휘몰아치는 리드미컬하며 압도적인 활력의 주 선율부 대신 홀컨보르흐가 주목한 건 맨 처음 분위기를 압도하던 낮은 브라스의 존재감이었다. 홀컨보르흐는 낮고 거칠며 어두운 튜바와 트롬본이 교차하는 소리들로 단순하지만 명징하게 고질라를 형상화했다. 홋카이도 토착 민족인 아이누의 전통 음악에 뿌리를 두며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사사받은 이후쿠베 아키라의 특색은 휘발됐지만, 원폭처럼 무시무시하게 생채기를 남기는 고질라의 공포와 위압감은 분명 이후쿠베의 유산이 확실하다. 반면 맥스 스타이너나 존 배리, 제임스 뉴턴 하워드가 매만졌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모험담을 지녔던 킹콩의 테마는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존재로 일신해 킹콩의 심경에 더 동화되게 만든다. 크고 웅장한 사운드지만 보다 영웅적이고 드라마틱한 색채를 부여해 고질라와는 차별점을 주었다.

그리고 끝판 대장으로 등장하는 그(!)를 위한 일렉트릭 사운드도 중후반 스코어를 장악한다. 이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모털 엔진>, <알리타: 배틀 엔젤> 그리고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등에서 메탈릭 느낌의 액션 스코어를 조성한 바 있는 홀컨보르흐는 익숙하게 신디사이저 펄스와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무겁고 날카로운 이펙트들로 중무장한 채 거대한 위용과 시원한 박력을 거침없이 표현해낸다. 마치 8-90년대 브래드 피델이 가장 잘 해냈던 냉혹하고 차가운 질감에 가까운데, 여기에 과잉의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 압도적인 퍼쿠션 등을 빽빽하게 때려 박은 소리들의 총합은 괴수 그 자체에 가까울 정도로 카오스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다만 이런 치고받고 부수는 비주얼에 맞춤 재단된 소리인 만큼 음악적 서사나 캐릭터들(이라고 해봤자 날뛰는 고지라와 킹콩이 전부지만)의 감정을 온전히 캐치하기란 쉽지 않다.


액션 영화음악의 장인 정키XL(톰 홀컨보르흐)

거대한 사운드를 담아내기 위한 홀컨보르흐의 욕심과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이 아는 샌디에이고의 악기 제작자에게 부탁해 소가죽이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지름 6피트(1m 80cm정도)에 달하는 거대 베이스 드럼을 제작해 대괴수들의 중후한 울림을 이끌어냈고, 세계적인 악기 음향 박람회 NAMM쇼에서 봐놨던 세계에서 가장 큰 14피트(4m 20cm정도)짜리 베이스 앰프를 활용해 풍부한 저음역대의 소리 샘플을 활용할 수 있었다. 또 말할 수 없는 소녀와 말 못 하는 괴수의 교감과 연대를 위해 마림바와 베이스 마림바, 퍼시픽 아일랜드 플루트 등을 활용해 이국적인 소리들로 영화에 몇 안 되는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살려냈다. 아울러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지구 공동설의 무대를 담아내기 위해 일렉트로니카로 구현한 신비하고 환상적인 접근법은 독특한 풍취를 안긴다.

아쉬운 건 과연 그의 말대로 현대 고질라 영화에 과거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후쿠베 아키라 테마를 사용하지 않을 만큼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는가란 의문이다. 이미 앞서 베어 맥크레리가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탁월하게 원곡을 재해석해 호평을 받았고, 이 영화 자체가 1962년작 <킹콩 대 고질라>의 여러 부분들을 오마주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홀컨보르흐 자신이 재조합한 고질라의 테마마저 이후쿠베의 아류로 들리며 충분히 변별점을 갖지 못했단 점에서 그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극강의 태그매치 대격돌의 비주얼을 위해 극단적으로 진화된(혹은 장르적으로 퇴화됐다고 볼 수도 있는)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며 파괴적인 그의 액션 스코어링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재 정키 XL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액션 음악을 잘 뽑아낼 수 있는 영화음악가라는 데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