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의 가장 큰 스승인 세종부터, 지식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의사의 교환이 쌍방향으로 통하는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다.
지금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스승의 날을 2월로 옮기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던 때가 있었다. 학년 초에 뭐라도 성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자식이 불이익을 입진 않을까 걱정하는 학부모들과, 들고 온 촌지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피차 불편하고 어색해지는 일을 견뎌야 하는 교사들 모두 5월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며 촌지를 요구하던 교사들이 점차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자식을 학교에 맡겨 둔 부모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이것저것 따지려면 모든 게 복잡해지니, 차라리 학년이 마무리되어 더 이상 담임 교사가 학생에게 유의미한 이익이나 불이익을 줄 수 없는 2월 말로 스승의 날을 옮기자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다행히도 2016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커피 한 잔, 카네이션 한 송이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된 이후 2월로 옮기자는 논의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5월 15일을 ‘혹시라도 선물을 받으면 거절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날’로 보내는 교사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일각에선 그날을 ‘스승의 날’이 아니라, 가르치는 이, 양육하는 이, 배우는 이가 모두 교육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교육의 날’로 기념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씁쓸하지만, 어쩌면 그게 모두에게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된 이유를 곱씹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5월 8일, 5월 26일 등으로 기념하던 ‘은사의 날’을 5월 15일로 옮겨 ‘스승의 날’로 기념한 이유는, 이 날이 세종대왕 이도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세종의 업적을 이 작은 지면 안에 다 담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조선의 국경을 완성했고, 사법체계를 확립했으며, 과학기술과 농업 기술을 발전시켰다. 집현전을 확대·개편하고 다양한 학문서적을 간행함으로써 유학, 천문, 음악, 역사 등의 학문을 육성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세종은 쉽게 만나기 어려운 국가 지도자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그 어떤 업적도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따라가긴 역부족이다. 국가의 역사에서 지식이 풍부한 지도자가 나올 수도 있고, 지식이 풍부한 관료를 채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이 사회 전반으로 효과적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제 의사를 담아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간파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선의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문자체계를 확립했다. 백성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그렇게 익힌 지식으로 제 목소리를 낼 수단을 만들어줬다는 의미에서, 세종은 ‘스승’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다.
세종(한석규)이 집현전 학사들과 궁 내 나인들, 궁 밖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는 내용을 담은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국가와 신분제도에 배반당해 온 강채윤(장혁)은 세종에게 말한다. 백성은 글자를 몰라서도 억울하게 죽지만 글자를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힘이 없어서 억울해지는 것이지 글을 몰라서 죽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글을 안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양반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깟 글을 알아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강채윤의 말도 틀린 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 없는 사람들은 지식이 없어서 당하는 게 아니라, 힘이 없어서 알면서도 당하고 사는 거니까.
세종은 이렇게 답한다. “글자를 알면 백성도 힘이 생긴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을 더 많이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양반이 되지는 않지만 양반들에게 그렇게 힘없이 당하지만은 않는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돌아서서 반격을 준비할 수 있는 힘,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서 읽고 내 억울함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힘은, 모두 글자에서 나온다. 바깥에서 자기 안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 안에서 바깥으로 제 뜻을 내보일 수 있는 수단인 글자에서. 지식을 독점하고 통제함으로써 ‘백성을 교화할 지식인’이라는 특권을 누리던 양반들의 질서는, 훈민정음의 탄생으로 크게 견제받았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들의 세상은 400년 넘게 유지되었지만, 훈민정음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끝내 우리가 세운 민주공화국의 문자체계가 되었다.
일각에선 세종이 훈민정음을 ‘왕명이나 국가 정책을 더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통치 수단’으로 만든 것이지, 백성들에게 발언권을 주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해석은 세종을 지나치게 현대적 의미의 국가지도자로 과대해석한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세종은 그 시절에 이미 조세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5개월 동안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펼치는 대역사를 펼쳤던 군주다.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국가 정책을 전달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굳이 백성들의 의견을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보았을까?
한반도 역사의 가장 큰 스승인 세종부터, 지식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의사의 교환이 쌍방향으로 통하는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 이도의 탄신일을 일방적으로 스승의 은혜만을 기리는 ‘스승의 날’ 대신, 가르치는 이와 양육하는 이, 배우는 이가 ‘모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의 교육의 의미를 되새기는 ‘교육의 날’로 기념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